중앙데일리

New presence for an old part of Korean life

Apr 04,2004


The modern history of Chinese immigration to Korea began in 1882, when the merchants of the Ching Dynasty followed the army of the Chinese empire that occupied the Korean Peninsula during the military revolt in 1882.

They settled in Myeong-dong, Sogong-dong and Gwansu-dong in Seoul and Seonlin-dong in Incheon. In fact, Myeong-dong, one of the busiest districts in Seoul, was developed by the Chinese merchants. They considered Myeong-dong the stepping-stone for their penetration into the Korean market, and built an expansive commercial quarter. In the 1930s, the heyday of the Chinese merchants, nearly 120,000 ethnic Chinese resided in Korea.

But after independence from Japan, new regulations and discriminative treatment discouraged the local Chinese community, and it dwindled to about 22,000 people. Currently, the only Chinatown in the country is in Incheon, but the number or residents there has decreased from several thousand to a mere 300 or so.

The fall of Chinatown is an exhibition of the exclusive structure of Korean society. The Chinatown in Sogong-dong, Seoul, disappeared in the early 1970s during a project to rebuild the central area. The Seoul city government had promised that it would build a new 18-story Chinese community center in return for clearing a Chinese business center in front of City Hall. But the promise was not kept, and the frustrated Chinese merchants sold off their remaining land and left the country, recalls Son Jeong-mog, a professor emeritus of the University of Seoul who was a city official at the time.

Another crisis hit the Chinese community in 1992 when Seoul began diplomatic relations with Beijing. Many Chinese here with Taiwan citizenship left the country after the change.

But the Chinese are coming back, and the recent boom owes to Koreans’ increased interest in China. The Korea Chinese Business Association has signed an agreement with the city of Incheon to build a Chinatown named “Rich Valley” on Yeongjong Island. The government is eager to attract capital from the 30 million overseas Chinese.

The Chinatown will be a sign of Korean globalization, but it might also be a prelude to Chinese influence in Korea, where the United States has been the dominant foreign influence.

The writer is an editorial writer of the JoongAng Ilbo.


by Lee Se-jung

미국서 온 편지

한국 화교의 역사는 1882년 임오군란 때 한반도에 진주한 청나라 군사를 따라 들어온 청나라 상인에서 시작됐다. 이들은 서울의 명동과 소공동.관수동 일대 및 인천의 선린동에 자리잡았다. 사실 서울의 명동은 이들이 만든 거리라고 할 수 있다. 화교들이 명동을 한국 진출의 발판으로 삼아 상가로 개발한 것이다. 화교의 전성시대였던 1930년대엔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가 12만여명에 달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각종 규제와 차별대우로 화교 사회가 크게 위축되면서 한국 화교는 2만2000여명 수준으로 줄었다. 한국의 차이나 타운은 인천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수천명에 달했던 이곳 거주자는 현재 300명 수준으로 줄었다.

차이나 타운의 쇠락은 한국 사회의 배타성을 거론할 때 대표적인 예로 등장한다. 서울 소공동 일대의 차이나 타운은 70년대 초 도심 재개발 사업으로 사라졌다. 당시 서울시는 18층 규모의 화교회관을 지어주겠다며 시청 광장 앞의 화교상가를 철거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화교들은 분통을 터뜨리며 나머지 땅까지 팔고 떠났다고 당시 서울시 간부였던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회고한다. 다른 물가가 다 오를 때 자장면 값만 꽁꽁 묶어놓기도 했다. 화교들은 92년 한.중 수교로 또 한번 시련을 겪었다. 당시 대만 국적이었던 화교 중 상당수가 서울 명동 중국대사관의 청천백일기가 내려오는 모습을 눈물로 지켜본 뒤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나섰다.

최근 화교들이 되돌아오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 토지소유 제한이 풀리고 중국과의 교역이 증가한 때문도 있지만 한국 사회의 중국 열풍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중국어가 영어에 이어 가장 많이 배우는 외국어가 되었을 정도다. 지난달 말 한국중화총상회는 인천 영종도 일대에 100만평 규모의 차이나 타운인 '리치 밸리'를 조성하기로 인천시와 양해각서(MOU)를 맺었다. 내년 10월엔 제7차 세계화상(華商)대회가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다. 정부도 현금자산만 2조달러를 갖고 있다는 전 세계 3000만명 화교의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적극적이다. 새 차이나 타운 건설은 한국 사회의 국제화를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지만, 미국의 영향력이 일방적이었던 한국에 중국의 힘이 밀려오는 조짐일 수도 있다.


이세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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