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데일리

‘Colluding in press room?’

Jan 18,2007


The Emperor Taizong of the Tang dynasty had an uncompromising critic. He grew sick and tired of the critic and swore he whould kill the critic. The critic’s name was Wei Zheng. He was a man of character who did not hesitate to give forthright comments to the emperor.
One day, Taizong received a handsome eagle. But shortly after taking time to adore the handsome eagle, Taizong was told Wei Zheng was coming to discuss national affairs. Taizong decided to hide the eagle under his cloths because he worried that Wei Zheng would accuse him of not working hard enough. His hope was that Wei Zheng would leave soon, but Wei Zheng deliberately delayed his departure as he sensed the eagle hidden in the emperor’s clothing. Wei Zheng slowly counted how many previous emperors had abandoned their duties owing to their indulgence in hobbies. The eagle had already suffocated long before Wei Zheng left, as it was smothered under he emperor’s robes too long.
When Wei Zheng died, the emperor went himself to Wei’s deathbed and grieved that “a copper mirror was for my cloth, a human mirror was for my correctness; now I lost a great mirror.” But after Wei Zheng’s death, the Tang dynasty began to decline, due to the campaign against Goguryeo. The fall of Tang is not entirely due to the loss of Wei, but at the same time it is also true there was no other personality that could produce so many forthcoming criticism of Taizong as Wei did.
The role of critics was immeasurable even in times when monarchy’s sovereign power was limitless.
In our history we can also find precedents: There were offices solely assigned for advice and criticism of the monarch in the Koryo and Joseon dynasties.
That office is comparable to journalism in a contemporary sense, in that it evaluated the rights and wrongs of policies and each ministry and sometimes impeached the king. Unilateral policies were the likely outcome of the administration when a monarch did not listen to its critics.
Likewise, the repercussions of bad policies backfired on people when critics failed to engage in honest censure of the corrupt bureaucracy. Journalists of Korea are nowadays described as “colluding in the press room” by the president, the highest authority of the state. The presence of a person who speaks the truth guarantees the progress not only of an individual, but of a state. About such an obvious truth the president tirelessly contentious. He has “weighty duties and a long way to go” besides that.

*The writer is the Beijing correspondent of the JoongAng Ilbo.


By Yoo Kwang-jong


언관


당(唐)의 최고 흥성기를 이끌었던 태종에게는 무서운 직언자가 있었다. 비수와 같은 날카로운 간언이 지속되다 그가 물러나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당 태종은 “저 늙은이를 죽여 버릴테다”며 고함까지 지를 정도였다.

그의 이름은 위징(魏徵). 당대를 통틀어 황제에게 가장 강력한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충신이었다. 어느날 하루 태종은 귀한 새매를 얻는다. 멋진 매가 귀여워 이를 어루만지던 태종은 “위징이 곧 도착합니다”라는 전언을 듣는다. 정사에 열중하지 않는다는 꾸중을 들을까 두려워 태종은 매를 품 속에 급히 감춘다.

위징이 얼른 물러가기를 바랐던 태종의 기대는 사그라졌다. 품 속에 감춘 매를 눈치 챈 위징이 시간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위징은 아울러 옛 군주들이 자신의 기호에 탐닉하다가 정사를 그르친 일을 천천히 열거했다.

그가 물러난 뒤에 이미 매는 숨이 끊어져 있었다. 품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곡절에도 불구하고 태종의 위징에 대한 애정은 깊었다. 그가 죽었을 때 황제가 그의 빈소를 직접 찾고 “구리로 만든 거울로는 의관이 흐트러진 것을 고치고… 사람의 거울로는 나의 득실을 밝혔으나 이제 위징이 죽어 큰 거울을 잃었다”고 한탄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위징이 죽은 뒤에 태종은 고구려 등을 향한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한다. 그 좋던 당 왕실은 이를 계기로 일차 쇠퇴의 길로 향한다. 위징이 죽어서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태종에게 직언을 그 만큼 할 인물도 없었던 게 사실이다.

군주의 권한이 말할 수 없이 컸던 왕조 시대에도 언관(言官)의 역할은 대단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고려와 조선 때에는 대간(臺諫)을 두고 국왕에 대해 간언토록 했다. 왕이 펼치는 정책에 대해 그 득실을 논하고 각 관료 기구의 과실을 논하거나 탄핵까지 하는 언론기관이었던 셈이다.

독주하는 왕권이 이 언관들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을 때 국정은 독선으로 흐르기 쉬웠다. 마찬가지로 관료사회의 부정부패 등에 언관이 제대로 개입하지 못할 경우 국정의 폐해는 그대로 백성에게 옮겨졌다.

요즘 한국의 언론인들이 “기자실에 죽치고앉아 담합이나 하는”식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 것도 국정 최고권자인 대통령에 의해서 말이다.

곁에서 옳은 말 잘 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사람도 살고 나라도 좋아진다. 자명한 이치인데도 대통령의 시비는 끊이지 않는다. ‘소임은 막중하고 갈 길은 먼데(任重道遠)’ 말이다.


유광종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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