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도원도 그림에도 사주팔자가 있다면 몽유도원도만큼 기구한 운명의 작품도 드물지 싶다. 동양 회화 최고 수준의 걸작이란 찬사가 과분하지 않을 작품이지만, 오늘날 일본땅에서나마 전해져 오는 건 요행 중의 요행이다. 하마터면 역적 모의의 증거품으로 몰려 " /> 몽유도원도 그림에도 사주팔자가 있다면 몽유도원도만큼 기구한 운명의 작품도 드물지 싶다. 동양 회화 최고 수준의 걸작이란 찬사가 과분하지 않을 작품이지만, 오늘날 일본땅에서나마 전해져 오는 건 요행 중의 요행이다. 하마터면 역적 모의의 증거품으로 몰려 ">

중앙데일리

‘Borrowing’ our cultural heritage

[분수대] 몽유도원도  PLAY AUDIO

May 13,2009



The classical landscape painting, “Mongyudowondo (Dream Journey to the Land of Peach Blossoms),” has gone through a twisted fate. The painting is a masterpiece of Eastern art, but was nearly on the verge of being lost forever. Fortunately the painting has been preserved, although it is in Japan, but it could have easily been destroyed as evidence of a plot to overthrow a Joseon king. Its story goes as follows.

One night in 1447, Prince Anpyeong, King Sejong’s third son, saw a paradise of peach trees in his dream. Afraid that he might forget the surreal memory, he had the painter Ahn Gyeon record his vision on canvas. On New Year’s Day three years later, the prince held a ceremony of appreciation for the painting with scholars and noblemen. Ahn Pyeong, an excellent calligrapher at that time, wrote the title and some 20 people including Kim Jong-seo, Seong Sam-mun, Park Paeng-nyeon, Choi Hang and Lee Gae, wrote and recited poems in praise of the painting. It became a masterpiece that combined poetry, calligraphy and painting.

A few years later in 1453, Prince Suyang staged a coup. He falsely accused his brother Anpyeong of a conspiracy and sentenced him to death. Prince Anpyeong’s artistic friends were killed as well.

If Mongyudowondo, which bears the stamps of the rebellious officials, had been delivered to Prince Suyang, the painting would have been regarded as evidence of the plot and burned. Nobody knows for sure, but perhaps the artwork was saved by someone who realized the aesthetic value of the painting.

After the coup, the whereabouts of the painting remained unknown. But some 470 years later, the painting turned up in Japan in 1929. A merchant in Osaka who was in possession of the painting at that time publicized the artwork’s existence among scholars. An 1893 certificate stating that the painting was the property of the Shimasu family was attached.

The Shimasu were kin to the feudal lord who ruled what is now Kagoshima for a hundred years. During the Imjin War in 1592, the Shimasus came to Korea with soldiers and abducted artists from Namwon and the vicinity as prisoners of war.

But since there are no records on the whereabouts of the painting before 1893, we cannot define it as having been stolen. Suspicion without any real evidence does not work in international law.

It is likely that we will be able to view the painting in Seoul in September. In coordination with Tenri University, which holds the painting today, Mongyudowondo will be borrowed and displayed for four weeks, as was done in 1996.

It is pleasing that we can appreciate our cultural heritage that contains the spirit of our ancestors. Nonetheless, it is shameful that we have to borrow it in order to do so.


The writer is a deputy political news editor of the JoongAng Ilbo.

By Yeh Young-june [yyjune@joongang.co.kr]




몽유도원도


그림에도 사주팔자가 있다면 몽유도원도만큼 기구한 운명의 작품도 드물지 싶다. 동양 회화 최고 수준의 걸작이란 찬사가 과분하지 않을 작품이지만, 오늘날 일본땅에서나마 전해져 오는 건 요행 중의 요행이다. 하마터면 역적 모의의 증거품으로 몰려 불쏘시개 신세가 될 뻔 했으니 말이다. 사연인즉 이렇다.

1447년 어느날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은 꿈에서 무릉도원을 봤다. 그 아스라한 기억속 황홀경이 잊힐세라 화가 안견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했다. 3년 뒤 정월 초하룻날, 안평대군은 학자,선비들과 감상회를 열었다. 당대의 명필 안평이 표제를 쓰고, 김종서ㆍ성삼문ㆍ박팽년ㆍ최항ㆍ이개 등 20여명이 찬시(讚詩)를 읊고 적었다. 몽유도원도는 시ㆍ서ㆍ화의 3절이 아우러진 명품으로 거듭났다.

다시 3년 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친동생 안평에게는 모반을 꾀했다는 죄목을 씌워 사약을 내려보냈다. 안평을 따르던 사대부들도 몰살을 당했다. 행여 역신(逆臣)들의 낙관이 줄줄이 찍힌 몽유도원도가 수양대군 측의 손에 들어갔더라면, 안평이 역모 동참자를 규합한 증거품으로 빼도 박도 못할 뻔했다. 혹시 모를 일이다. 그림의 진가를 알아본 누군가가 몰래 빼돌려 혼자서만 즐기려 했는지.

계유정난 이래 행방이 묘연하던 그림은 450여년이 지난 1929년 일본땅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소장자였던 오사카 상인이 학자들에게 그림을 공개한 것이다. 1893년 11월 현재, 가고시마 시마즈(島津) 가문의 소장품이란 증명서도 첨부돼 있었다. 시마즈 가는 사쓰마 번, 즉 오늘날의 가고시마 지방을 수백 년 동안 지배한 영주 가문이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조선에 병사를 이끌고 왔다가 남원 일대에서 도공을 포로로 잡아가기도 했다. 15대째 일본 땅에 뿌리내린 심수관 가문은 당시 포로의 후예다. 하지만 1893년 이전의 행방에 관한 기록이 일체 없으니 몽유도원도를 무작정 약탈문화재로 단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증 없이 심증만으론 통하지 않는 게 국제법의 세계다.

9월쯤이면 이 몽유도원도를 다시 서울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1996년에 이어 4주간 대여전시키로 현 소장자인 텐리(天理)대측과 협의가 이뤄진 것이다. 선조의 얼이 담긴 문화유산을 그렇게라도 친견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지만, 빌려 볼 수 밖에 없다는 건 후손된 입장에서 너무나 부끄럽고 송구스런 일이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



dictionary dictionary | 프린트 메일로보내기 내블로그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