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데일리

The Heartbeat of Racism Is Denial

인종주의의 핵심은 부정입니다

Mar 10,2018


When our reality is too ugly, we deny reality. It is too painful to look at. Reality is too hard to accept. Mental health experts routinely say that denial is among the most common defense mechanisms. Denial is how the person defends his superior sense of self, her racially unequal society.

현실이 너무 끔찍할 때 우리는 현실을 부정합니다. 보기가 고통스럽고, 받아들이기가 괴롭기 때문이죠. 정신 건강 전문가들에 따르면 부정은 가장 흔한 방어기제입니다. 우리는 현실 부정을 통해 자신의 우월감을 유지하기도 하고 사회의 인종차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도 합니다.


Denial is how America defends itself as superior to “shithole countries” in Africa and elsewhere, as President Trump reportedly described them in a White House meeting last week, although he has since, well, denied that. It’s also how America defends itself as superior to those “developing countries” in Africa, to quote how liberal opponents of Mr. Trump might often describe them.

부정은 미국이 세계 각 지의 “똥구덩이 국가”들로부터 우월감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그런 표현을 쓴 적이 없다고 밝혔지만요. 트럼프 대통령의 리버럴한 정적들의 마인드도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개발도상국”과 같은 단어로 돌려서 표현하기는 하겠지만 말이죠.


Mr. Trump appears to be unifying America — unifying Americans in their denial. The more racist Mr. Trump sounds, the more Trump country denies his racism, and the more his opponents look away from their own racism to brand Trump country as racist. Through it all, America remains a unified country of denial.

트럼프 대통령은 “부정”으로 미국 사회를 통합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는 인종차별적 발언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그 자신은 더 강하게 인종주의자 혐의를 부인하고 정적들은 자기 속에 내재된 인종주의를 부인하며 트럼프에게 낙인을 찍기에 바쁩니다.


The reckoning of Mr. Trump’s racism must become the reckoning of American racism. Because the American creed of denial — “I’m not a racist” — knows no political parties, no ideologies, no colors, no regions.

트럼프 대통령의 인종주의는 곧 미국의 인종주의입니다. 그의 추한 면에 대한 인식은 곧 우리 자신의 추한 면에 대한 자각입니다. “나는 인종주의자가 아니다”라는 미국인들의 신조는 정당, 이념, 피부색, 지역을 가리지 않죠.


On Friday, Senator Richard J. Durbin, Democrat of Illinois, affirmed that Mr. Trump did use the term “shithole” during a White House meeting on immigration with lawmakers. Mr. Durbin rightfully described Mr. Trump’s words as “hate-filled, vile and racist,” and added, “I cannot believe that in the history of the White House in that Oval Office, any president has ever spoken the words that I personally heard our president speak yesterday.”

문제가 된 대통령의 발언이 나왔던 자리에 동석했던 민주당 소속의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리처드 더빈은 해당 발언이 “혐오로 가득찬 인종주의적 발언이었다”며 “백악관 역사 상 그 어떤 대통령도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But Mr. Trump is no exception. In framing Mr. Trump’s racism as exceptional, in seeking to highlight the depth of the president’s cruelty, Mr. Durbin, a reliably liberal senator, showed the depth of denial of American racism.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트럼프의 인종주의가 특출나게 나쁜 것인 것처럼, 그의 발언이 특별히 잔인했던 것처럼 강조하는 과정에서 더빈 의원은 미국의 전형적인 자기 부정 마인드를 노출하고 말았습니다.


Begin with the eight presidents who held slaves while in the Oval Office. Then consider how Abraham Lincoln urged black people to leave the United States. “Even when you cease to be slaves, you are yet far removed from being placed on an equality with the white race,” Lincoln told five black guests at the White House in 1862. So “it is better for us both, therefore, to be separated.” Raging then as we are raging now, the abolitionist William Lloyd Garrison responded, “Can anything be more puerile, absurd, illogical, impertinent, untimely?” He added that “had it not been for the cupidity of their white enslavers, not one of their race would now be found upon this continent.”

백악관에서 노예를 부렸던 여덟 명의 대통령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링컨 대통령조차도 흑인들이 노예 신세를 면해도 백인과 동등한 위치에 놓이게 될 날은 멀고 멀었으며 백인과 흑인은 분리되는 것이 서로에게 낫다며 백악관을 방문한 흑인 손님들에게 미국을 떠나라고 권한 바 있습니다. 당시에도 대통령의 발언에 지금 우리가 분노하듯 분노한 사람이 있었죠. 노예 폐지론자 로이드 개리슨은 “이보다 더 멍청하고 어리석고 비논리적이며 무례하고 시기적으로 부적절한 말이 또 있단 말인가?”라며, “애초에 백인들의 탐욕이 아니었다면 흑인들은 이 대륙에 올 일도 없었다”고 대통령의 발언을 비난했습니다.


Presidential history also includes the social Darwinism of Theodore Roosevelt, the federal-government-segregating, “Birth of a Nation”-praising Woodrow Wilson — and the bigotry that came from the mouths of presidents who are generally seen as essential to racial progress. President Lyndon B. Johnson said “nigger” nearly as often as Ku Klux Klansmen did.

그 밖에도 백악관에 살았던 사람 중에서는 사회진화론의 지지자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KKK 미화 영화 “국가의 탄생”을 칭송했던 우드로우 윌슨이 있습니다. 인종 문제에 있어 미국 사회의 진보에 필수적인 역할을 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린든 존슨마저도 흑인에 대한 멸칭인 “니거(nigger)”라는 단어를 밥 먹듯 썼던 인물이죠.


This denial of racism is the heartbeat of racism. Where there is suffering from racist policies, there are denials that those policies are racist. The beat of denial sounds the same across time and space.

이렇듯 인종주의의 핵심은 바로 부정입니다. 인종차별적 정책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에는 그 정책이 인종차별이 아니라는 주장이 반드시 존재하죠. 그와 같은 부정의 양상은 시공을 초월합니다.


I grew up to the beat of racist denial in Queens, not far from where Mr. Trump grew up. I was raised in the urban “hell” of neighborhoods he probably avoided, alongside immigrants from countries he derided last week. In school or elsewhere, we all heard recitals of the American ideal of equality, especially on the day we celebrate the life of the Rev. Dr. Martin Luther King Jr. Those events often feature recitals of the words “all men are created equal,” which were written by a slaveholder who once declared that black people “are inferior to the whites in the endowments both of body and mind.”

저도 뉴욕 퀸즈의 인종차별에 대한 부정 속에서 자랐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고향과 멀지 않은 곳이지만, 그가 피해 다녔을 험한 동네, 그가 무시한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과 함께였죠. 학교를 포함한 모든 곳에서 우리는 미국의 이상이 평등이라고 배우며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삶을 칭송했고, 동시에 흑인은 신체와 정신 모든 면에 있어서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말했던 노예 소유주가 쓴 독립선언서의 글귀(“모든 이는 평등하게 태어났다”)를 읊으며 자랐죠.


Thomas Jefferson was not a founding father of equality. He was a founding father of the heartbeat of denial that lives through both Mr. Trump’s denials and the assertion that his racial views are abnormal for America and its presidents.

토머스 제퍼슨은 평등의 아버지와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오히려 부정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죠. 그의 정신은 오늘날 자신이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는 트럼프 대통령, 그리고 대통령의 인종관이 특출나게 사악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의해 충실하게 계승되고 있습니다.


Fifty years ago, Richard Nixon transformed this historic heartbeat of denial into an intoxicating political philosophy. His presidential candidacy appealed to George Wallace-type segregationists while also attracting Americans who refused to live near “dangerous” black residents, obstructed the desegregation of schools, resisted affirmative action policies, framed black mothers on welfare as undeserving, called the black family pathological and denigrated black culture — all those racists who refused to believe they were racist in 1968.

50년 전, 리처드 닉슨은 이 부정의 정신을 정치 철학으로 한 차원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조지 월리스 류의 인종분리주의자들에게 어필하면서, 동시에 “위험한 흑인들”과 이웃으로 지내기를 거부하고 소수자 우대 정책에 반대하며 흑인 가정을 가부장적이라고 비판하고 흑인들의 문화를 비하하면서도 스스로를 꿈에도 인종주의자라고 여기지 않았던 미국의 수많은 유권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백악관에 입성했죠.


Nixon designed his campaign, one of his advisers explained, to allow a potential supporter to “avoid admitting to himself that he was attracted by” the “racist appeal.”

닉슨 캠프의 한 고문은 잠재적인 지지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인종주의적 어필에 끌리고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선거 전략이었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A new vocabulary emerged, allowing users to evade admissions of racism. It still holds fast after all these years. The vocabulary list includes these: law and order. War on drugs. Model minority. Reverse discrimination. Race-neutral. Welfare queen. Handout. Tough on crime. Personal responsibility. Black-on-black crime. Achievement gap. No excuses. Race card. Colorblind. Post-racial. Illegal immigrant. Obamacare. War on Cops. Blue Lives Matter. All Lives Matter. Entitlements. Voter fraud. Economic anxiety.

사람들은 자신의 인종주의를 부인하기 위한 새로운 어휘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법과 질서”, “마약과의 전쟁”, “모범적인 소수자”, “역차별”, “인종중립적”, “개인의 책임”, “흑인에 의한 흑인 대상 범죄”, “불법 이민자”, “오바마케어”, “경찰의 목숨도 중요하다”, “생명은 모두 소중하다”, “권리 의식”, “부정 투표” 등 다양한 표현들이 이에 해당하죠.


The denials using these phrases come from both conservatives and white liberals who think people of color are stuck in cycles of unstable families and criminal cultures, and that the deprivations of poverty and discrimination spin out bad people.

이와 같은 부정의 어휘를 사용하는 것은 보수 뿐이 아닙니다. 흑인들이 불안정한 가정 및 범죄 문화의 악순환 속에 갇혀있고 빈곤과 차별이 나쁜 사람들을 만들어낸다고 믿는 백인 리버럴들도 자신의 인종주의를 부정하기 위해 이런 어휘를 사용하곤 하죠.


Mr. Trump opened his candidacy with racism, calling Mexicans criminals and rapists. Since taking office, he has looked away from the disaster zone in Puerto Rico, he has called some violent white supremacists “very fine people,” and he has described Nigerians as living in “huts.”

트럼프는 멕시코인들을 범죄자, 강간범으로 낙인찍으며 인종차별로 대선전의 막을 열었습니다. 당선 후에도 폭력적인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매우 괜찮은 사람들”로 부르거나, 나이지리아인을 “오두막”에 사는 사람들로 칭하는 등 수많은 어록을 남겼습니다.


When someone identifies the obvious, Mr. Trump resounds the beat of denial as he did before he was president: “I’m the least racist person that you’ve ever met,” that “you’ve ever seen,” that “you’ve ever encountered.”

이처럼 명백한 근거를 들이대도, 트럼프 대통령은 끊임없이 이를 부인합니다. “내가 당신이 만나본 사람 중 인종주의자와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일 것”이라면서요.


These are ugly denials. But it’s the denials from those who stand in strong opposition to this president that are more frustrating to me: denials that their attacks on identity politics are racist. Denials that the paltry number of people of color in elite spaces marks racism.

추한 부정의 말들입니다. 그러나 트럼프의 대척점에 서있으면서도 자신의 인종주의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서 저는 더 큰 좌절감을 느낍니다. 그들은 정체성 정치에 대한 자신들의 공격은 인종차별이 아니라고 부정하며, 엘리트계에 비백인이 별로 없는 것 자체가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부정하곤 하죠.


Those denials echo the same ones that frustrated Dr. King in 1963 as he sat in a Birmingham jail cell and wrote, “Shallow understanding from people of good will is more frustrating than absolute misunderstanding from people of ill will.”

마틴 루터 킹 목사 역시 1963년 버밍햄 교도소에 앉아 “선의를 가진 사람들의 얄팍한 이해가 악의를 가진 사람들의 절대적인 오해보다 훨씬 더 큰 좌절감을 준다”고 적었습니다.


Mr. Trump, I suspect, will go to his grave with his heart beating in denial of the ill will of racism. Many others will as well.

트럼프 대통령도 무덤에 가는 순간까지 자신이 악이적인 인종주의자임을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트럼프만의 이야기는 아니죠.


Because we naturally want to look away from our ugliness. We paint over racist reality to make a beautiful delusion of self, of society. We defend this beautiful self and society from our racist reality with the weapons of denial.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추악함을 외면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종차별로 얼룩진 현실을 외면한 채, 나 자신, 우리 사회에 대해 아름다운 환상을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부정이라는 무기로, 현실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Denial is fueled by the stigma associated with being a racist. Feeding the stigma is how “racist” is considered almost like an identity, a brand.

인종주의자에게 찍히는 낙인은 이와 같은 부정의 정신을 더욱 부추깁니다. “인종주의자”가 하나의 정체성이나 브랜드처럼 여겨지는 현실이 이러한 낙인 효과를 강화하죠.


But a racist is not who a person is. A racist is what a person is, what a person is saying, what a person is doing. Racist is not a fixed category like “not racist,” which is steeped denial. Only racists say they are not racist. Only the racist lives by the heartbeat of denial. The antiracist lives by the opposite heartbeat, one that rarely and irregularly sounds in America — the heartbeat of confession.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인종주의자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나 하는 행동이 인종주의적인 것이죠. “인종주의자”는 “인종주의자 아님”과 같이 고정된 어떤 카테고리가 아닙니다. 자신이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 건 인종주의자들 뿐입니다. 인종주의의 핵심이 부정의 정신이라면, 반(反)인종주의의 핵심은 고백의 정신일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매우 찾기 힘든 부류죠.


By IBRAM X. KENDI

The New York Times Curation
January 23, 2018

*한글 번역 전문은 newspeppermint.com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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