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시볼드 1947~52년 일본 도쿄에서 미국 민간관리가 맡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세 직책을 겸직한 인물이 있었다. 미 국무부 주일 정치고문, 연합군 최고사령부 외교국장, 연합국 대일이사회 미국 대표 겸 의장이었던 윌리엄 시볼드(1901∼80)다.정병준 " /> 윌리엄 시볼드 1947~52년 일본 도쿄에서 미국 민간관리가 맡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세 직책을 겸직한 인물이 있었다. 미 국무부 주일 정치고문, 연합군 최고사령부 외교국장, 연합국 대일이사회 미국 대표 겸 의장이었던 윌리엄 시볼드(1901∼80)다.정병준 ">

중앙데일리

Sebald and Dokdo

[분수대]윌리엄 시볼드  PLAY AUDIO

July 30,2008

Between 1947 and 1952, one person held the three most important posts that a civilian American could have in Tokyo. William J. Sebald (1901-80) was the U.S. Department of State’s political adviser in Japan, foreign affairs director of the Allied Forces Supreme Commander and representative of the United States to the Allied Forces’ Board of Directors in Japan. Jeong Byeong-jun, a professor at
Mokpo University, views Sebald as the primary figure who started the argument between Korea and Japan over the Dokdo islets. This is from a paper printed in the summer 2005 edition of the quarterly publication, “Yeoksa Bipyeong,” or “Criticizing History.”

Sebald studied at the U.S. Naval Academy and was appointed as U.S. military attaché to Japan in 1925.
He studied Japanese for three years and married a second-generation English-Japanese woman whose father was an English lawyer and the mother a Japanese painter. In 1930, he was discharged from the service, acquired a license to practice law in the United States and took over the Kobe Law Firm that his father-in-law managed in Japan.

Having completed his military service during World War II, he was appointed as a special assistant to the political adviser of the Allied Forces Supreme Commander in Tokyo in 1945. In 1946, having passed a special exam, he qualified as a diplomat. To him, Japan was an orderly society of polite and diligent people; he was impressed by the frugal aspects of society there. He was personally close to the Japanese imperial family, high-ranking officers and politicians. He co sidered Shigeru Yoshida the Winston Churchill of Japan.

The problem is he exercised influence when the Allied Forces and Japan were preparing a peace treaty. In the first to the fifth drafts of the U.S. peace treaty, Dokdo was referred to as Korean territory. However, Sebald proposed to the U.S. Department of State that Dokdo be categorized as Japanese.

“Japan has long claimed the island and it seems just. It is difficult to view it as an island close to Korea.” He even sent to the United States a book written by the Japanese Foreign Ministry that claimed the island as Japan’s property. The U.S. Department of State accepted the proposal. Starting from the sixth draft to the ninth, it included Dokdo as belonging to Japan. However, the United
Kingdom and Australia were opposed to the claim, and the United States stepped back. In the end, in the San Francisco Peace Treaty signed in September 1951, Dokdo was not mentioned at all. Based on this treaty, Japan began to claim ownership over Dokdo.

In November 1954, Japan asked Sebald, who was U.S. State Department Assistant
Secretary responsible for the Far East, about the U.S. stance on bringing a lawsuit on the Dokdo issue to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It is better if the two sides solve the problem instead of bringing a lawsuit,” he said. But he sided with Japan and the problem remains a stumbling block to friendly neighborly relations.

The writer is an editorial writer of the JoongAng Ilbo.

By Cho Hyun-wook [poemlove@joongang.co.kr]


윌리엄 시볼드


1947~52년 일본 도쿄에서 미국 민간관리가 맡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세 직책을 겸직한 인물이 있었다. 미 국무부 주일 정치고문, 연합군 최고사령부 외교국장, 연합국 대일이사회 미국 대표 겸 의장이었던 윌리엄 시볼드(1901∼80)다.정병준 목포대 교수는 그를 한일간 독도 분쟁의 불씨를 만든 핵심 인물로 본다. 계간 역사비평 2005년 여름호에 게재한 논문 '윌리엄 시볼드와 독도 분쟁의 시발'이 그런 내용이다.

해군사관학교 출신인 시볼드는 25년 주일 미국대사관 무관부에 근무하면서 3년간 일본어를 공부한다. 이때 결혼한 여성이 일본인 2세로 장인은 영국인 법률가, 장모는 일본인 화가였다. 30년 전역한 그는 미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딴 뒤 일본에서 장인이 운영하던 코베 법률회사를 맡았다. 2차대전 군 복무를 끝낸 그는 45년 도쿄 주재 연합국 최고사령관 정치고문단 특별보좌역으로 임명된다. 46년엔 이듬해 특별 시험을 거쳐 정식 외교관이 됐고 승승장구의 나래를 편다.그에게 일본은 질서잡힌 사회,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들, 성실하고 검약한 사회기풍으로 감명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일본 왕족, 고급장교, 정치인과 친밀했던 그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수상을 '일본의 처칠'이라고 평가했다.

문제는 그가 영향력을 발휘한 시기가 연합국과 일본간의 강화조약이 준비, 체결되는 시기와 겹친다는 점이다.당초 미국측 강화조약 1~5차 초안은 독도를 한국령으로 명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볼드는 49년 11월 미 국무부에 독도를 일본에 귀속시킬 것을 건의했다. "이 섬에 대한 일본의 주장은 오래 되었으며,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근해의 섬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는 내용이다. 그는 일본 외무성이 작성한 영유권 주장 책자도 미국에 보냈다. 이를 받아들인 미 국무부는 6~9차 초안에서 독도를 일본령으로 포함시킨다. 하지만 영국과 호주가 반대하자 미국은 한발 물러섰다.결국 51년 9월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선 독도에 대한 언급 자체가 빠졌다. 일본은 이를 기초로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54년 11월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이던 시볼드에게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데 대한 미국측 견해를 물었다. 시볼드는 "제소보다는 양자 해결이 바람직하다. 일본은 주장을 계속하며, 태만에 의해 권리가 침해당하지 않도록 한국에 각서, 혹은 여타 정기 공문을 보내야 한다"고 권고했다. 시볼드는 호주대사를 끝으로 공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다. 한국민의 분노의 뇌관으로, 한일 양국의 우호 선린의 걸림돌로, 국력과 외교력을 시급히 키워야할 또 하나의 이유로.

조현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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