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데일리

Coup or revolution? A ‘May 16’ discussion

“5·16은 쿠데타로 태어났지만 혁명으로 성장했다”

May 16,2011
Cho Kab-je, left, a veteran journalist known for his conservative views, and Kim Ho-ki, right, a progressive-minded sociology professor at Yonsei University, had a dialogue over the evaluation of the May 16, 1961 military coup led by General Park Chung Hee. By Choi Jeong-dong

Assessing May 16, 1961 may be an unpleasant task but, for the country to have the right path for the future, it is necessary to better understand a watershed moment in its history of modernization.

The JoongAng Sunday arranged a two-man discussion between Cho Kab-je, a veteran journalist known for his conservative views, and Kim Ho-ki, a progressive-minded sociology professor at Yonsei University, to better evaluate the merits and demerits of the events of 50 years ago. Kim Jong-hyuk, editor-in-chief of the JoongAng Sunday, moderated the discussion held Thursday.

Moderator - There are three different perspectives looking at the May 16 event. The first is that it was an unforgivable military coup that broke a normal political order. The second is that it was a revolution that opened Korean society to a new stage of development. The third is that it was a coup, but can be legitimized because it resulted in paving the way for to economic growth and prosperity. Which perspective do you take?

Cho Kab-je - It is a coup on the surface, but, it was a revolution in terms of result. Through the May 16 events, the Republic of Korea has changed fundamentally. The change, led by Park Chung Hee and followed by businessmen and scientists, led to industrialization and enabled democracy. In any country, there is much blood shedding in the reform process for modernization. Park Chung Hee brought this to Korea with minimum cost.

Kim Ho-ki - An objective assessment based on fact is important. It is fundamentally a coup d’etat.

The April civil uprising (The April 19 movement in 1960) brought a shift from Syngman Rhee autocracy to democracy and the military suspended the constitutional order. It is difficult to see it as a revolution. Like England’s Glorious Revolution, the French Revolution and the American Revolution, it can be called revolution when its propagators are citizens and it brings changes in social structure. The May 16 brought changes in social structure, but its propagators were soldiers.

Moderator - Was the achievement of industrialization, as a result of the May 16 events, big enough to cover it being labeled as a coup?

Kim - It has its own light and shadow. May 16 indeed helped Korea get over the “barley hump” (when Korea didn’t have enough food) but fast industrialization masked underlying sacrifice in the agricultural sector and the suffering of the labor class. It also created an issue of the chaebol (the society becoming too much dependent on conglomerates).

Cho - Fostering large companies was not a problem but is rather Park’s biggest feat. Large companies have created jobs and enriched government coffers by paying huge taxes. In his era, the distribution of wealth was also relatively equal.

Kim - Growth of large companies and small- and mid-sized companies should have gone hand in hand. Eighty to 90 percent of the jobs are created from SMEs.

Moderator - Park Chung Hee’s Yusin constitution in October 1972 was a scenario for a lifelong grip on power. What was Park’s idea of democracy?

Cho - Park thought a sudden application of democracy, which the West built for hundreds years, would bring the demise of either the country applying it or the democracy itself. He judged that it was better to put a hold on it temporarily.

Kim - Democracy takes different forms in many countries. Although Park called it a Korean style of democracy, it was not a democracy but a dictatorship.


By Lee Hyun-taek [joe@joongang.co.kr]


한글 관련 기사 [중앙일보]

“5·16은 쿠데타로 태어났지만 혁명으로 성장했다”

언론인 조갑제 - 김호기 연세대 교수…‘5·16 50년’ 평가

오늘은 5·16이 일어난 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대한민국의 정치와 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5·16을 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1948년의 건국에 이어 대한민국을 산업화·근대화로 이끈 출발점이 5·16이다. 1961년 ‘혁명’을 한다며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던 박정희의 산업화 정책에 힘입어 오늘 우리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도약했음을 부인하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럼에도 5·16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박정희의 인기는 압도적 1위다. 그런 높은 인기는 학계의 일반적 평가와 상반된다. 5·16을 민주주의를 억압한 군사 독재의 시작으로 보는 이들이 학계에선 많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최근엔 5·16으로 경제발전의 시동이 걸린 덕분에 중산층이 많이 배출됐고, 그게 민주화의 토대를 제공했다는 새로운 평가가 나오고 있다. 5·16은 ‘독재’라는 형식으로 시작됐지만 결과적으론 민주화를 이루는 데 기여했다는 시각이다.

반세기 전의 5·16을 어떻게 봐야 할까. 박정희 전문가인 언론인 조갑제(조갑제닷컴 대표)씨와 진보성향의 사회학자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다른 견해를 보였다. 중앙SUNDAY(5월 15일자 1, 4, 5면)가 기획한 둘의 대담을 요약한다.

◆5·16의 성격=5·16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산업화가 성공적이라고 해서 군인들의 쿠데타까지 미화할 순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선 “쿠데타로 태어났지만 나라를 새롭게 바꾸는 혁명으로 성장했으므로 평가해야 한다”는 반론이 있다.

김호기 교수는 “당시 사회가 혼란했느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군부가 헌정 질서를 중단시켰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쿠데타”라고 규정했다. 5·16으로 등장한 박정희 체제가 근대화의 한 축을 이루는 산업화를 성취했다는 걸 김 교수는 부정하지 않았다. 60년대 보릿고개를 벗어나게 하고, 70년대 중화학공업을 육성해 우리 경제가 이례적으로 세계 경제 속에 자리 잡게 했음을 그는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박정희 체제의 그늘도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농업부문의 희생과 저임금에 시달린 노동자 계급, 그리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균형발전이 이뤄지지 않은 건 큰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조갑제 대표는 “성격은 쿠데타지만 결과는 혁명”이라고 했다. 5·16을 통해 대한민국이 본질적으로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정희가 주도하고 기업인과 과학자가 따라와 산업화가 됐고, 그걸 통해 민주주의가 가능하게 됐다”고 그는 주장했다.

◆5·16과 민주화=김 교수는 박정희 체제에 대해 “선거나 투표, 언론자유, 정당정치와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부정했다”고 비판했다. 5·16과 10월유신(1972년)으로 두 번이나 헌정을 중단시켰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조 대표는 “5·16과 10월유신을 역사적 잣대로 봐달라”고 했다. “서양에서 수백 년 걸린 민주주의를 우리가 단기간에 이뤄냈음을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조 대표는 “이승만 시대에 교육 확충으로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생겨났다. 그들에 의해 4·19(1960년)가 일어났다. 박정희는 중산층을 많이 만들었는데 부마(釜馬)사태도 그들이 일으켰고 그런 시위가 김재규에게 영향을 줘 박정희는 피살됐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자기 성공의 희생자였다”고 주장했다.

재야인사였던 장준하씨가 ‘사상계’ 잡지에 5·16을 지지하는 글을 썼던 일도 토론주제가 됐다. 조 대표는 “5·16에 협조한 사람이 많았다.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알면서도 묵인했다. 장면 총리는 총성이 나자 군 통수권을 버리고 수도원으로 가 버렸다.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다’고 했고 진압군 동원을 거절했다”는 식으로 당시 정황을 설명하며 5·16의 정당성을 부각했다. 반면 김 교수는 “5·16에 대한 국민적 평가는 63년 대통령 선거에 잘 반영됐다. 박정희가 가까스로 이겼다. 당시 도시에선 박정희보다 윤보선 표가 많았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김 교수는 “5·16세력이 군정을 마치고 군에 복귀하지 않고 정치에 참여한 것은 시민적 관점에서 보자면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군인들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자 조 대표는 “정치적 열망이 아니라 국가 개조의 열망이었다”고 반박했다. 두 사람은 정중한 태도를 지키면서도 날카롭게 대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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