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데일리

A long history together (K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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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 25,2019
SHIN KYUNG-JIN
The author is a Beijing correspondent of the JoongAng Ilbo.

The U.S-North Korea summit in Hanoi, Vietnam, will take place this week. In Vietnam, the “Doi Moi” policy is hot. In Vietnamese, Doi Moi literally means “making selling and buying goods easy for the first time.” In Vietnam, free trade is considered innovative.

When U.S. President Donald Trump enticed North Korea with his mention of an “economic rocket,” he was referring to Vietnam. The precedence of normalizing relations after the war also played a part. He is sending a message that North Korea should follow Vietnam’s path.

Vietnam’s history with South Korea, North Korea, the United States and China is complicated. Feb. 17 was the 40th anniversary of the Sino-Vietnamese war. There are no memorial events. The Vietnam Academy of Social Sciences merely held a forum to “part with the past and move to the future” a day earlier. Nguyen Phu Trong, general secretary of the Communist Party of Vietnam, ordered the investigation of the anti-state figures who attempted to take advantage of the northern frontier incident — Vietnam’s official name for the 1979 war with China — to destroy the party’s and the state’s relationships with China. Memorial activities are banned in China too after Chinese President Xi Jinping’s visit to Vietnam right after the 19th party congress in 2017.

Then, why did North Korea choose Vietnam? The two countries’ history is a hint. In 1957, Ho Chi Minh visited Pyongyang, and Kim Il Sung visited Hanoi the following year. The two attended the military parade at Tiananmen in Beijing celebrating the 10th anniversary of the establishment of the new China in 1959. Kim stood next to Premier Zhou Enlai and Ho Chi Minh was next to Mao Zedong. After the Gulf of Tonkin incident took place in August 1964, U.S. forces bombed North Vietnam and deployed ground forces there. Kim Il Sung visited Hanoi again in November.

North Korea offered to send troops to North Vietnam, but it turned down the offer. Instead, North Korean MiG units joined the air defense of Hanoi. Eighty-seven pilots carried out Kim Il Sung’s order to defend it as if it were the sky over Pyongyang.

North Korea’s support for Vietnam did not end there. In mid-1965, its strategy against South Korea turned violent. Using the vacuum of troops sent to South Vietnam, North Korea penetrated the South. On Jan. 21, 1968, North Korean guerillas entered South Korea to attack the Blue House. Two days later, the USS Pueblo was captured by North Korea during reconnaissance in the East Sea.

Half a century has passed since then. “100,000 Korean residents [70,000 in reality] in Hanoi are preparing a welcoming parade,” said a WeChat message a Korean resident in Beijing showed me. Amid the cheering, the warnings have subsided.

JoongAng Ilbo, Feb. 22, Page 30
환호 속의 경종
신경진 베이징 특파원

베트남 북·미 정상회담이 다음 주다. 베트남은 도이머이(㌒ᤓ) 정책으로 ‘핫’하다. 쉬울 이(易), 마주할 대(對), 시작할 시(始), 살 매(買). 도이머이의 베트남식 한자 표기인 자남(字喃)을 쪼개면 “서로 물건 사고팔기를 처음으로 쉽게 했다”가 된다. 베트남에서 자유로운 거래를 혁신이자 쇄신으로 여겼다는 뜻이다.

“경제 로켓”을 말한 트럼프 대통령은 베트남의 쇄신을 평가한다. 전쟁 뒤 관계를 정상화한 선례도 작용했다. 북한도 베트남의 길을 가라는 메시지다.

베트남을 둘러싼 남·북·미·중의 역사는 복잡하다. 우선 중국. 지난 17일은 중국-베트남 전쟁 발발 40주년이었다. 추모활동은 없었다. 베트남 사회과학원이 16일 “과거와 작별하고 미래로 향하자”는 주제로 개최한 포럼이 전부였다. 응우옌푸쫑(阮富仲) 공산당 총서기는 “북부변경 사건(79년 중월전쟁의 공식 명칭)을 이용해 소란을 선동하고 당·국가 및 중국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반체제 인사를 엄중히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추모활동 금지는 중국도 마찬가지다. 2017년 79년 전쟁을 그린 영화 ‘팡화(芳華)’의 흥행에도 전쟁은 다시 잊혀졌다. 시진핑 주석이 같은 해 19차 당 대회 직후 베트남을 찾아 과거사를 봉합한 덕이다.

그렇다면 다낭 대신 하노이를 고집했다는 북한이 베트남을 고른 이유는 무얼까. 양국 역사 속에 힌트가 숨어있다. 1957년 호찌민이 평양을, 58년 김일성이 하노이를 답방했다. 둘은 59년 신중국 성립 10주년 베이징 천안문 열병식도 함께했다. 김일성은 저우언라이 총리 옆에, 호찌민은 마오쩌둥 옆에 자리했다. 1964년 8월 미국 구축함이 공격받은 통킹만 사건이 터졌다. 미군은 북베트남을 폭격하고 지상군을 투입했다. 김일성이 11월 급하게 하노이를 다시 찾았다. 한일협정은 이듬해 체결됐다. 시급한 한·미·일 삼각동맹의 필요성이 컸다.

북한도 대규모 파병을 제안했다. 베트남이 사절했다. 대신 북한 미그기 부대가 하노이 영공 방어에 투입됐다. 파일럿 87명이 평양 상공처럼 수호하라는 김일성 지령을 수행했다. 김일성 제안으로 심리전과 땅굴전의 고수 100여명도 파견했다.

북한의 베트남 원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65년 중반 대남전략을 폭력투쟁으로 전환했다. 월남 파병 공백을 노려 후방침투를 감행했다. 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을 위한 북한 게릴라가 광화문까지 침투했다. 이틀 뒤 동해 위에서 정찰 중이던 미군 푸에블로함을 납치했다. 유용태 서울대 교수는 “북·중·베의 긴밀한 연계 속에 추진된 동아시아 차원의 양동전략일 가능성”을 말했다.(『환호 속의 경종』 2006, p.335)

반세기가 흘렀다. “하노이 10만(실제 7만) 교민들이 (김정은) 환영퍼레이드 준비를 잘하고 있습니다.” 베이징 교민이 하노이에서 받은 소식이라며 전해준 위챗 메시지다. 환호 속에 경종은 잦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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