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s own Walk to Canossa
In 1077, Emperor Henry IV of the Holy Roman Empire crossed the Alps and arrived at the castle of Canossa in northern Italy to perform penance to Pope Gregory VII. Gregory, who excommunicated the emperor not long before, was staying in the castle at the time, but the emperor had to stand in the snow outside of the castle for four days without food, wearing only underclothes. Only after Henry knelt before the pope and begged for forgiveness did the pope lift the excommunication. This was the Walk to Canossa, which symbolically established the supreme power of the Catholic Church.
Before the incident, the pope and the emperor had a symbiotic relationship. To expand the Catholic Church, the pope needed the military power of the monarch. In return, the church gave the king the right to appoint clergymen. Gregory, however, wanted to change that, believing the church should be independent from the state to fully restore the rights of the church. So Gregory rescinded Henry’s right to elect bishops in 1075. The emperor then dethroned the pope, and the pope, in return, excommunicated the king. The Walk to Canossa represented the pope’s victory over the emperor.
The history of Europe in the Middle Ages is dotted with wars, as the church and the state were constantly at odds with each other over who would have the upper hand. The English expression, “separation between church and state,” was first used by Thomas Jefferson in a letter sent to a Baptist church in Danbury, Connecticut, in 1802. This principle was later reflected in the country’s constitution and spread to other countries that supported democracy.
Our Constitution stipulates that “No state religion shall be recognized, and church and state shall be separated.” Nevertheless, the Christian Council of Korea threatened the leaders of the ruling party by declaring that the church would launch a campaign against the candidates of the party if it passed a bill that would provide a tax exemption for local issuers of Islamic sukuk bonds. One of the most respected Protestant evangelists in Korea pledged that he would devote his life to toppling President Lee Myung-bak if the government backed the sukuk legislation.
Cowed by the threat, the ruling party postponed the passage of the bill indefinitely, and the president has refrained from making any comment. The 21st century version of the Walk to Canossa is happening in Korea.
The writer is an editorial writer of the JoongAng Ilbo.
By Shim Shang-bok
한국판 카노사의 굴욕
1077년 1월 신성로마제국(중세의 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알프스산을 넘어 북(北)이탈리아 카노사 성(城)에 당도했다. 얼마 전 자신을 파문(破門)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서였다. 교황은 그때 잠시 그 성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성문이 열리지 않아 황제는 내복 차림으로 사흘간 금식하며 살을 에는 추위를 견뎌야 했다. 그런 다음에야 교황에게 머리를 조아린 뒤 복권될 수 있었다. 중세 교권(敎權)이 속권(俗權)을 압도한 ‘카노사의 굴욕(Humiliation at Canossa)’사건이다.
그 전까지 교황과 왕은 공생관계였다. 교황은 기독교 세력의 확장을 위해 왕의 군사력이 필요했다. 대신 교회는 왕에게 성직자 임명권을 줬다. 그레고리오 7세는 이전 교황들과는 사뭇 달랐다. 교회를 바로세우기 위해서는 왕권으로부터 온전히 독립해야 한다고 믿었다. 1075년 12월 그레고리오 7세는 마침내 하인리히 4세의 주교직 서임권을 금지시켰다. 황제는 즉각 반격에 나서 교황에 대해 폐위(廢位)를 선언했다. 교황도 ‘눈에는 눈으로’ 나왔다. 황제를 파문했다. 싸움은 주교와 공작들이 교황 편에 서면서 황제의 패배로 끝났다. 카노사의 굴욕이 그 결과다. 둘의 반목은 그 뒤에도 이어졌다. 살아난 하인리히 4세는 3년 와신상담 끝에 그레고리오 7세를 교황자리에서 쫓아내고 말았다.
‘아비뇽의 유수(幽囚)’ 1309~1377년은 왕권이 교권을 압도했다. 프랑스 왕이 교황청을 자신의 지배 아래 두기 위해 남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중세 유럽 역사는 정치와 종교가 엉키면서 온갖 부조리와 전쟁을 낳았다. 가톨릭이 국교였던 프랑스는 대혁명 이후 정교분리 원칙을 받아들였다. 영어 표현 ‘separation between Church and State’는 1802년 토마스 제퍼슨이 덴버리 침례교회에 보낸 편지에 처음 쓰였다고 한다. 이 정신은 그 뒤 미국 헌법에 반영되었고,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다른 나라에도 파급되었다.
우리 헌법도 20조 2항에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개신교의 교황청쯤에 해당하는 한국기독교총연맹이 여당 지도부에 이슬람채권법이 통과되면 낙선운동을 펼치겠다고 협박했다. 며칠 뒤엔 존경 받는다는 원로 목사가 대통령 하야운동에 목숨을 걸겠다고 했다. 여당은 바로 겁먹고 법안 처리를 무기 연기했고, 대통령은 입도 뻥긋 못하고 있다. 21세기 한국판 카노사의 굴욕이 벌어지고 있다.
심상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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