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 to utilize SNS in education on unif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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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 to utilize SNS in education on unif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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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 Myung-chul

Just days after taking office as director of the Ministry of Unification’s Education Center for Unification, Cho Myung-chul was immersed in work at his new office in Insu-dong, northern Seoul.

Cho is the first North Korean defector to be given a high-ranking public service position. His new post is a first-grade rank in Korea’s nine-grade system. In an interview with the JoongAng Ilbo, Cho gave insight into his new job and personal life.

Cho has high hopes for the education center and plans to make big changes during his two-year term.

“Unification Minister Hyun In-taek has asked me to ‘get inside the role to really do it properly.’”

To fulfill his mission, Cho plans to visit as many places as he can to make education on unification more effective. “I plan to use social networking services such as Twitter and Facebook to get my message across,” said Cho.

Cho then spoke about his family and his upbringing in North Korea. His was a privileged one compared to most North Koreans. Cho’s father had been minister of construction there. Cho grew up in northern Chungcheong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occupation and after the Korean War, he went on to Kim Il Sung University.

Later, Cho studied in Russia until 1955. At the time, his mother was a professor of statistics. His parents were among Pyongyang’s social elite, so he enjoyed a relatively free lifestyle.

When Cho was a teenager, he went to school with Kim Jong-il and his half-brother, Kim Yong-il.

“When I went to middle school, I was told that even if I were to become their friends, I could not talk with them without being respectful in my words,” Cho said.

He added that almost everyone he went to school with currently holds high-ranking positions in the North Korean government.

As for his parents, Cho is not aware of their fate since his defection.

“Some have said they were banished from the country; some say they are in Pyongyang. Everyone says differently. A few years ago, I heard my father had passed away,” he said.

Cho said his decision to leave his family and defect was not an easy one to make. “I wanted to bring the Kim Jong-il regime to its senses,” he said. “There was this free world, and I felt my work in the previous decades had been in vain.”

Cho defected in July 1994 when he was a visiting professor at Nanjing University in China.

According to Cho, all North Koreans who spend time abroad must report for weekly meetings and receive “ideology education” at embassies. Being a university professor was no exception and teaching was a grueling lifestyle as well, as professors were required to hand in their syllabuses six months before classes were held. Then they faced approval by seven university officials. “Everything the professors said would be reported to the North Korean police,” Cho said.

After arriving in South Korea, Cho said he turned down teaching jobs because he thought the South had the same policies.

Cho said he has enjoyed South Korea’s freedom. He has advice for defectors that face vast economic and social obstacles to integration into South Korean society. He tells them “not to complain” because being in South Korea “is a special privilege.”

“What they do with their freedom is up to them, is my advice.”


By Noh Jae-hyun [christine.kim@joongang.co.kr]


한글 관련 기사 [중앙일보]

통일교육원장 된 조명철 전 김일성대 교수

탈북자 첫 ‘1급 공무원’에게 남북한을 묻다
“자유민주주의 배운 남한, 행동은 왜 … ”

북한 김일성종합대 교수 출신인 조명철(52)씨가 8일 통일부 산하 통일교육원장에 임명됐다. 고위 공무원 가급(1급)이다. 2만3000명이 넘는 국내 탈북자 가운데 고위 공무원은 이번이 처음. 조씨는 1994년 7월 국내에 들어와 최근까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서 북한경제 전문가로 일했다. 서울 강북구 인수동 통일교육원 집무실로 조명철 원장을 찾아간 것은 지난 11일. 토요일 휴무일인데도 그는 업무 파악을 하느라 출근했다.


-원장 취임을 각계에서 두루 수긍하고 축하하는 분위기다.

“부담이 너무 커 잠이 안 온다. 며칠간 하루 200통씩 축하전화가 쇄도했다. 상당수가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동료 탈북자들의 전화였다. 내게 실력이 있어 주어진 자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탈북자에게 준 혜택이자 기대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이 북한 출신에게 기득권을 나눠 준 것이다. 북한에도 소식이 알려질 것이다. 기득권을 나눌 수 있어야 통일 과정에도 도움이 된다.”

-개방직인 통일교육원장에 지원해 선발됐는데, 평소 뜻이 있었나.

“한국에 온 이후 든 의문이 있다. 대한민국의 기본은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시장경제다. 전 국민이 그렇게 교육받는다. 그런데 교육받고 나온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은 마치 서로 다른 교육을 받은 사람들 같다. 자유민주주의 교육을 받았으면 자유민주주의적으로 행동해야 하지 않겠나. 원인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교육이 너무 형식적인 탓일까? 교육자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일까? 북한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전달자 주관에 따라 가공해, 아니면 일부만 가르치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사실 통일교육이라면 좀 지루하고 딱딱한 이미지가 있다.

“통일부가 애를 많이 쓰는데도 인력·예산의 한계가 있었을 거다. 장관(현인택)께서 ‘국민 속에 들어가 제대로 해 달라’고 당부하셨다. 피부에 와 닿는 교육을 할 거다. 기업이든 학교에든 ‘찾아가는 교육’, 개개인 입장을 배려한 ‘맞춤형 교육’을 하고 트위터·페이스북 같은 정보화 수단도 최대한 활용하겠다.”

-대북 정책이 정권에 따라 냉·온탕을 오간다고들 한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세계가 경탄하는 발전을 이루었다. 튼튼한 안보로 우리 체제를 지키면서 북한을 변화시켜야 한다. 목표를 북한의 변화에 두고 상황에 따라 교류협력·제재 등 다양한 수단을 구사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분이 교류나 제재 자체를 목표인 양 생각한다. 햇볕정책도 교류협력이 목표처럼 되는 바람에 기능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북한선 ‘성분’이 좋은 집안이었다.

“아버지(조철준)는 정무원 건설부장(건교부 장관)이었다. 충북 보은군 출신으로, 일제 때 고보를 졸업하고 해방 후 김일성대학에 들어갔다. 소련에 유학 가 건축공학을 전공하고 1955년 귀국했다. 평양의 국가계획위원회 건물, 흥남비료공장 복구 설계를 아버지가 했다. 어머니(강하옥)는 인민경제대학 통계학 교수였다. 덕분에 장·차관 자제들만 다니는 평양 남산학교(인민반·중등반·고등반)를 나왔다.”

-그럼 김정일의 중·고교, 대학 후배인 셈인데.

“김일성 전 주석의 5남매가 다 남산학교 졸업생이다. 김평일·영일은 나와 같은 시기에 다녔다. 중등반에 들어가니 친해도 그들에게 반말을 하지 말라고 시키더라. 고등반 때는 선생들까지 그들에게 존댓말을 써야 했다.”

-북한 요직에 남산고등중학 동창이 많겠다.

“요즘 또래 선후배들이 장·차관급에 등용되는 추세인 것 같다. 당중앙위 군사부장 오일정은 4년 선배, 외무성 부상 이용호와 대외보험총국장 서동명은 3년 선배다. 조선중앙은행 총재 백용천은 후배이고.”

-부모님은 살아계실까.

“추방됐다 하고, 평양에 있다고도 하고. 소식을 전하는 이마다 말이 달랐다. 몇 년 전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중국 난카이(南開)대학 교환교수 시절 탈북했다. 결심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김정일 정권이 내 행동에 자극받아 정신차리게 하고 싶었다. 욱하는 마음도 있었다. 자유세계가 이러한데, 지나온 몇십 년이 억울했다. 북한 주민은 해외에 체류해도 주말마다 생활총화를 하고, 대사관 불려가 정책교양·학습·우상화교육을 받는다. 1월 1일엔 노동신문 한 면 전체에 실리는 김일성 신년사를 받아 통째로 외워야 한다. 1월 4~5일께 다 암기했는지 시험을 보는데, 받침 하나라도 틀리면 1점 감점이다. 100점 만점에 70점 이상을 받아야 무사하다. 외화 들여 내보냈으면 공부를 시켜야지 그게 뭔가.”

-그래도 김일성대 경제학부 교수라면 낫지 않았겠나.

“아니다. 대학교수들을 학내에서 유치원생처럼 줄 세워 훈련시키는 곳이 북한이다. 강의를 맡은 과목은 6개월 전에 강의록(보통 90분짜리 70개)을 만들어 강좌장(학과장)·부학부장·학부장·사회과학부장·사회과학부총장·제1부총장·총장 등 7명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 해외에서 들어온 책·논문을 보려 해도 똑같이 사인 7개를 받아야 한다. 그러니 무슨 학문 발전이 있을 수 있겠나. 강의가 끝나면 학생 프락치 두어 명이 보위부원에게 달려가 교수의 발언을 보고한다. 오죽했으면 내가 한국 입국 직후 사정을 잘 모르던 시절 한 대학에서 교수직 제의가 왔기에 ‘교수 하려면 여기 오지도 않았다’며 거절했겠나. 나중에야 오해한 걸 깨달았지만.”

-고위급 탈북자인데, 우리 정보기관이 많이 신경 쓰고 ‘관리’했을 것 같다. 불편하지 않았나.

“역시 우리 국민은 실상을 잘 모른다. 나는 자유사회에 온 해방감이 너무 커서 지나치게 자유분방할 때도 있었다. 94년은 대학에서 데모 많이 할 때였다. 이 좋은 세상에서 열심히 즐기고 공부하지 왜 데모하는지 의아했다. 역대 정권에서도 비판하는 말 다 했다. 관리든 감시든 내가 느낄 정도가 전혀 아니었다. 하긴, 눈치채게 한다면 정보기관이 아니겠지만(웃음).”

-탈북자 중에 적응 못하고 좌절하는 이도 많다.

“내 경우 17년간 몸담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역대 원장·동료들이 정말 큰 힘이 돼주었다. 그분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나도 없다. 2만 명 탈북자를 못 껴안으면서 2000만 북한 주민을 어떻게 포용하겠는가. 국민이 넓은 마음을 갖고 따뜻한 눈길과 손길을 보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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