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ke Seokguram right ‘before I die’
Published: 03 Jul. 2011, 21:34
Among the pioneers who have devoted their lives to such cultural research projects is Kim Jeong-ki, former director of the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After studying traditional architecture in Japan, Kim returned to Korea in 1959 and was soon part of history: He discovered the Gameunsa Temple site in Gyeongju, the ancient capital of the Silla Dynasty.
Some of Kim’s other major projects include Cheonmachong, Hwangnamdaechong, Bulguk Temple and Sungnyemun (also called Namdaemun).
Last month, the JoongAng Ilbo met with Kim, who, at the age of 81, has been calling for the redressing of the historically inaccurate restoration of the Seokguram Grotto - a Unesco World Heritage site and one of Korea’s most important national treasures.
Q. What was the problem with the reconstruction project?
A. The grotto’s layout includes an arched entrance leading into a rectangular antechamber and then a narrow corridor into the main rotunda where the centerpiece is the statue of a seated Buddha. The two figures of Vajradhara that stand on both sides of the entrance to the corridor leading to the main rotunda were originally bent at 90 degree angles as if they were bowing toward Buddha. But when the wooden superstructure was built over the antechamber in 1961, the two statues were made upright to make more space for the wooden structure to fit inside. I knew that it was wrong, but I was young and had no right to have a say. It is just my hope that I see it repaired to its original form before I die.
There is criticism of the use of concrete to restore the grotto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grotto’s granite ceiling was already broken off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ll of the experts then believed that filling the ceiling with cement and covering it with clay would be the solution to prevent it from collapsing. But later, it resulted in humidity buildup and water leaks. Encasing the grotto structure with cement was a major mistake, but they are not to be solely blamed. Back then, everyone in the field - including me - learned that steel-reinforced concrete is permanent.
Is it true that Bulguk Temple could have been reconstructed with concrete, too?
When excavation of Bulguk Temple was already complete, I was promoted to lead cultural property research at the Cultural Properties Administration (now the Cultural Heritage Foundation). This gave me an opportunity to take charge of Bulguk Temple’s restoration. At the time, President Park Chung Hee instructed me to restore the temple with steel-reinforced concrete. But I had to convince the president it should be built with wood by pointing out how Shitenno-ji in Osaka, Japan, broke off after it was reconstructed with steel-reinforced concrete.
Tell us about excavating Hwangnamdaechong and Cheonmachong in Gyeongju.
When President Park gave orders to excavate Hwangnamdaechong, the largest ancient tomb from the Silla era, I wasn’t very open to the idea considering its historic value and size. So I suggested first excavating the smaller tumulus in front of Hwangnamdaechong, which is Cheonmachong. When hundreds of valuable historic relics and golden accessories were excavated from Cheonmachong, I had no choice but to eventually excavate Hwangnamdaechong. I still remember how the weather suddenly deteriorated when I excavated the golden crown from Cheonmachong. I even sprained my leg while moving the crown from the tomb to the office. From then on, I would always tell my fellow researchers to stay reverent and quiet when excavating ancient tombs.
What is your view on current excavation and restoration projects such as Sungnyemun?
I think current excavation projects are much better compared to 20 years ago in terms of knowledge. But sometimes, I think researchers today conduct projects too hastily. And as the researcher who restored Sungnyemun in 1962, I am quite suspicious about the amount of money invested to restore Sungnyemun today. Back then, we didn’t need that much money for the project. It wasn’t necessary.
By Lee Kyong-hee [estyle@joongang.co.kr]
한글 관련 기사 [중앙일보]
민족 정체성 찾기김정기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석굴암 잘못 복원, 아는 사람 몇 없어 내가 바로잡아야 하는데 …
김정기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최근 작고하신 미술사학자 황수영 선생께서 제가 한국에 와서 일하도록 다리를 놔주셨고, 지금의 아내도 소개해주셨다. 석굴암 복원을 그 분이 주도하셨기에 잘못됐다는 말을 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문화유산은 과학이다. 범죄의 비밀을 벗기는 데 과학수사가 있다면, 역사의 비밀을 밝히는 데에도 과학은 필수조건이다. 우리나라 발굴의 역사는 김정기(81)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에서 고건축을 전공하며 발굴 경험을 쌓았던 그는 1959년 한국에 돌아와 경주 감은사지를 발굴한다.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발굴이었다. 숭례문 해체복원, 지석묘(고인돌) 발굴, 경주 천마총·황남대총·황룡사지 발굴, 불국사 복원, 익산 미륵사지 발굴 등에 그가 있었다. 일선에서 물러나 서울 은평구 신사동의 단독주택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그에겐 한가지 남은 소망이 있다. 석굴암의 잘못된 복원을 바로잡는 것이다.
-석굴암 전실의 8부중상(八部衆像·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의 조각상)이 잘못됐다고 했는데요.
“원래 본존불 쪽을 바라보며 90도로 꺾여 있던 전실 입구쪽 신장상(神將像) 2개를 61년 복원하면서 옆의 것들과 일자가 되게 나란히 펼쳐버렸어요. 전실 목조건물 지을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죠. 문화재위원회에서 변경을 허락한 게 잘못이에요. 석굴암 복원엔 잠깐 참여했다 빠졌고, 당시 30대 초반이라 큰 소리도 못 냈지만 가능하면 내가 죽기 전엔 원상태로 복원됐으면 해요. 관계된 분들이 돌아가셔서, 이걸 알고 있는 사람이 몇 없어요.”
-일제강점기에 수리복원이 된 것이라, 이미 원형이 아니었다는 말도 있는데요.
“8부중상을 일부러 구부린 흔적은 없었어요. 펴기 이전의 모습이 원형이라고 믿고 있어요. 석굴암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인데, 원래 모습을 찾아야죠.”
-일제 때 콘크리트로 수리한 것도 말썽인데요.
“일제 때 이미 천장돌이 떨어져 있었죠. 당시 석굴암을 영원히 보존하려면 일정한 두께로 시멘트를 쳐서 굳혀놓고 그 위에 흙을 덮어놓으면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장마 때면 안팎 습도 차이로 안에 물이 줄줄 흐르고 풍화가 심해졌어요. 큰 실수였지만 나무랄 순 없어요. 제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철근 콘크리트는 영구적이라고 배웠으니까요. ”
신라 조형미의 결정체인 석굴암의 3D 전경.
-불국사도 콘크리트로 복원될 뻔했다면서요.
“불국사 발굴을 끝낸 상태였는데,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실장으로 갑자기 발령이 나 복원을 맡게 됐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가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 하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일본 출장을 갔어요. 오사카의 시텐노지(四天王寺)가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된 직후였죠. 일본이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가늘고 긴 회랑 건물은 깨질 수밖에 없을 거다, 모조리 사진을 찍어오자고 마음 먹었죠. 아니나 다를까 제 생각대로 전부 깨져있었죠. 그렇게 보고해서 결국 목조로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어요.”
-불국사는 세계문화유산이 됐는데요.
“복원할 땐 되도록이면 오래된 양식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하지만 통일신라 건축양식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를 다 모아도 30%가 안 되는데 그걸 갖고 추정 복원할 수는 없거든요. 발굴 자료에 근거해 복원하다 보니 고려 중기부터 조선 중기까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의 양식은 불국사에서 다 볼 수 있게 됐어요. 목조건축의 박물관인 셈이죠. 완공 뒤에도 단청을 화려하게 빛나도록 하라는 대통령 지시가 내려왔어요. 고민하다가 조각의 이빨 같은 부분에만 약간 광택 나는 코팅을 해주고 말았어요. ”
-경주 고분 발굴도 반대하셨다고요.
“황남대총을 발굴 복원하라는 각하 지시가 내려왔어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덩치가 큰 무덤인데, 그렇게 하나뿐인 유적은 함부로 손대지 말았으면 했거든요. 그래서 거기에서 꼭 금관이 나오란 보장이 없으니 그 앞에 있는 작은 무덤을 시범적으로 발굴해보자고 제안했어요. 그게 천마총이었죠. 그때 하도 신경을 써서 머리가 하얘졌어요. 금관은 물론 천마도 등 엄청난 유물이 쏟아졌죠. 별 수 없이 황남대총도 발굴하게 됐고요.”
-천마총 금관을 들어낼 때 폭우가 내렸다던데.
“갑자기 맑았던 하늘이 새카매지고 천둥 치고 비가 퍼부었죠. 금관을 옮기다가 계단에서 발도 삐었어요. 사무실에 갖다 넣고 나니 다시 맑아지고. 저는 무덤 발굴할 때 조사원에게 큰 소리 내지 말고 웃지 말고 콧소리도 내지 말고 경건하게 하라고 시켜요. ”
-요즘의 발굴을 어떻게 보시는지.
“20년 전만 해도 돌만 찾아내는 게 발굴인 줄 알고 기단(基壇) 안의 흙을 다 퍼내는 미숙한 팀도 있었어요. 그런 흙에도 옷이나 인골이 섞여 있을 수 있는데 말이죠. 요새는 그렇게 험한 꼴은 안 보여요. 다만 서둘러서 거칠게 한다는 느낌은 받아요. ”
-60년대 숭례문 복원에 참여하셨습니다. 요즘 숭례문 복원은 어떻게 보시는지.
“잘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요. 62년에 한 것과 비교하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돈이 들어간다는 것에 약간 의구심이 있죠. 전통방식으로 복원하는 것까진 좋지만 현장에 대장간을 만들어놓고 사람들이 보고 갈 수 있게까지 한 건 과잉이에요. 내 말이 꼭 옳은 건 아닐 겁니다.”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