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the North sought to change
Published: 01 Aug. 2011, 16:54
Koreans tasted the joy of liberation from Japanese rule in 1945, but it was brief because they split into two over ideological differences and to pursue different destinies. The contrast is too manifest to even ask which was more successful. North Korea, choosing to stagnate during the rapid changes of the post-Cold War era and to ignore globalization, fell further and further behind in the race for viability against the neighboring South. In a desperate attempt to stay in the race and upset the widening imbalance with the South, the next move from North Korea - as claimed by Michael Green, the Japan chair at the 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in Washington, in a recent contribution to the JoongAng Ilbo - “will not be dialogue, but another provocation.”
North Korea has not always resisted calls for change. On July 25, 1994, the leaders of the two Koreas had planned to hold their first summit in Pyongyang. After South Korea reached a national consensus to build mutual trust with North Korea, the two sides held eight rounds of senior-level talks and signed in 1991 an agreement on reconciliation, nonaggression, exchanges and cooperation as well as a joint declaration on the 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placing the two Koreas on the same path toward peaceful unification. Both joined the United Nations, displaying maturity and the ability to co-exist as separate members of the global community.
But North Korea’s obsessive and sneaky pursuit of nuclear weapons led to its withdrawal from the 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in 1993, casting dark clouds over the Korean Peninsula. Things briefly looked brighter when North Korean leader Kim Il Sung met with former U.S. President Jimmy Carter in June 1994 and displayed an interest in an inter-Korean summit. Kim hinted that Pyongyang could finally address the changes in international affairs, join in them, and push bilateral ties with Seoul and Washington to new lev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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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과 사물은 예외 없이 시간과 변화 속에 존재하므로 그 변화와 도전에 어떻게 순응, 대응, 적응하느냐에 따라서 문명과 국가의 흥망성쇠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갈파한 아놀드 토인비의 대작 「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가 출간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직후였다. 아마도 그 당시의 토인비조차도 2차 대전의 유산인 한반도의 분단이 66년이나 지속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되는 분단과 대결의 상황 속에서 2012년에는 한민족에게 큰 어려움이 닥칠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국민들은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와 같은 불안감은 어디서 말미암은 것일까.
1945년 해방의 감격도 한 순간, 남과 북은 냉전의 대결구도 속에서 분단되어 각기 생존과 발전을 위한 적응과 선택의 경쟁에 전력투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60여 년에 걸친 그 경쟁의 성적표를 지금에 와서 새삼 점검할 필요가 있을까마는 이데올로기는 급격히 효력을 잃어가는 반면 시장의 세계화는 급속도로 진전하며 국제적 세력판도가 재편될 수밖에 없었던 탈냉전의 고비에서 변화보다는 현상유지를 택했던 북한의 결정이 한반도의 경쟁구도를 불균형의 늪으로 빠지게 하였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 그 불균형의 결과로 「북한의 다음 수순이 대화 보다는 도발의 가능성이 높다」는 외국전문가의 판단(마이클 그린, 「평양의 다음 각본」 중앙일보 2011.7.9) 이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동안 북한이 무작정 변화의 필요성을 외면하였던 것만은 아니다. 17년 전 오늘, 1994년 7월25일 평양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우리가 여야합의로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채택한 후 1991년부터 남북 간에는 여덟 차례의 고위급회담이 있었고 그 결과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이 채택되어 평화통일로의 행진이 시작되는 듯 보였다. 남과 북이 함께 유엔회원국이 됨으로써 평화공존의 기틀도 마련되었다.
그러나 핵무기개발사업을 비밀리에 계속하던 북한의 집착은 1993년 NPT탈퇴로 이어졌고 한반도 하늘에는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그렇듯 위태로운 상황에서 1994년 6월 김일성은 카터 전 미국대통령과 만나고 남북정상회담에도 긍정적 반응을 보이며 북한이 세계사적 변화에 순응하여 남북관계 및 미북관계를 새로운 지평으로 옮겨놓는 노력에 동참하겠다는 입장변화를 시사 하였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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