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s greatest pitcher passes away at 53

A place of remembrance for Korean baseball pitcher Choi Dong-won was set up at the Sinchon Severance Hospital in Seoul yesterday. [NEWSIS]
The National Health Insurance Corp. (NHIC) Ilsan Hospital in Goyang, west of Seoul, said Choi lost his battle with colorectal cancer. The former right-hander for the Lotte Giants in the Korea Baseball Organization (KBO) was first diagnosed with cancer in 2007 while serving as manager for the Hanwha Eagles in the minor league. But he improved over the following two years and was named a supervisor for the KBO in 2009.
But his condition had worsened as of late and he was hospitalized recently at the Ilsan institution.
Choi pitched eight seasons in the KBO, six with the Giants, based in his hometown of Busan. His best season came in 1984, his second year in the league.
Choi won the most valuable player (MVP) honor that year after leading the league with 27 wins and 223 strikeouts in 284 2/3 innings. The strikeout total remains the KBO’s all-time single season record.
Choi also helped the Giants take the Korean Series title in 1984. In the best-of-seven championship round, Choi earned all four victories for the Giants, appearing in five games and throwing three complete games. No other pitcher since has won all four games for his club in a best-of-seven playoff series.
Dubbed “iron arm” for his endurance, Choi pitched more than 200 innings in each of his first five seasons. But he later had a fallout with the Giants’ management for trying to found a KBO players’ union, and was traded to the Samsung Lions after the 1988 season.
He spent two mediocre seasons with the Lions before retiring at 32.
Previously, Choi was poised to become the first Korean in Major League Baseball following a dominant amateur career. In 1981, he signed a deal with the Toronto Blue Jays. At an international tournament held in Edmonton earlier that year, Choi had pitched a one-hit shutout against Canada and carried a perfect game into the ninth inning. Scouts later said Choi had the ability to pitch in the big leagues immediately.
At the time, Choi had not yet completed his mandatory military service, but the government waived his duty. But in a controversial move, the government decided Choi would only get his exemption if he stayed in the country and that he would have to complete his military service if he wanted to pitch in the U.S. With the Blue Jays threatening to take legal action, Choi stayed put and became a star in the KBO.
He dabbled in politics but lost his bid for a seat as an opposition lawmaker in Busan in 1991. He also provided commentary for television and radio baseball coverage and even tried his hand at a television sitcom. Choi began his coaching career in 2001.
Choi is survived by his wife and son.
After hearing of his death, baseball fans, players and coaches sent their condolences. “He was the best pitcher in Korea,” said Giants manager Yang Seung-ho.
Yonhap
한글 관련 기사 [중앙일보]
어머니가 병상에서 건네준 야구공… 그가 손에 꼬옥 쥐었다
최동원 1958 ~ 2011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이 별세한 14일, 프로야구가 벌어진 각 구장에서도 고인에 대한 애도와 추념이 이어졌다.
선수들은 경기가 열리기 전 일제히 묵념을 하며 한국 프로야구를 빛낸 선배의 넋을 기렸다. 특히 고인이 선수로 뛴 롯데(1983~88년)와 삼성(89~90년)이 맞붙은 대구구장에서는 선수들이 왼팔에 근조 리본을 달고 경기에 나섰다. 양팀은 이날 치어리더 등 응원단을 운영하지 않았다.
류중일 삼성 감독은 “아마추어 때 쿠바를 만나면 상대 선수들이 늘 초이(Choi·최동원)만 찾았다. 얼마나 공이 좋았으면 외국 선수들이 다 기억했겠나”라고 고인을 회상했다. 김용국 삼성 수비코치도 “1984년 한국시리즈 때 합숙하면서 최동원 비디오만 계속 돌려봤다. 그런데도 졌다. 최동원 한 명에게 진 시리즈였다”고 말했다.
롯데 선수들은 대선배의 뜻을 기리며 우승을 다짐했다. 조성환은 “사직구장 전광판에 나오는 84년 한국시리즈 때 최 선배의 영상은 교과서와 다름 없다. 팀에 대한 헌신과 희생정신이 느껴진다. 우승한다면 최 선배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대호는 “롯데를 우승시킨 선배님에게 우승으로 보답하고 싶다”고 했다.
개봉을 앞둔 영화 ‘퍼펙트 게임’에서 최동원 역을 맡은 배우 조승우도 조성환을 통해 애도의 마음을 전했다. 조성환은 “조승우씨에게 소식을 알렸더니 ‘영화가 다 만들어졌을 때 최동원 감독님께 보여주고 싶었는데 안타깝다. 이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이 고 최동원 감독을 기억하길 바란다’고 했다”고 말했다.
고인이 지도자로 몸담았던 한화 구단의 선수들도 깊은 조의를 표했다. 류현진은 2006년 데뷔 당시 1군 투수코치였던 고인에 대해 “선수들을 정말 친근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신 분이다”며 아쉬워했다. 김혁민은 “선수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신 분이다. 많은 걸 배우고 느꼈다”고 고인을 회상했다.
고인의 동생인 최수원(44) 한국야구위원회(KBO) 심판원은 최 전 감독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손에 쥐었던 물건이 ‘야구공’이었다고 전했다. 최 심판원에 따르면 최 전 감독의 가족은 지난 10일 병원 측으로부터 “마지막을 준비하셔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어머니 김정자씨는 아들에게 줄 마지막 선물을 골랐다. 최 전 감독이 현역 시절 모았던 물품을 정리하던 김씨는 아들의 이름이 새겨진 공을 발견했다. 김씨는 공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 아들의 손에 건넸다.
최 심판원은 “공을 쥔 형은 평소와 달랐다. 움직이는 듯했다”고 말했다. 최 전 감독의 경남고 선배인 허구연 MBC 야구해설위원은 “동원이 어머님께서 ‘마지막으로 공을 잡게 했다’는 말씀을 하셨다. 가슴이 짠했다”고 말했다. 최고의 투수다운 마지막이었다.
병마와 싸우는 중에도 고인은 한국 프로야구의 발전을 지켜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최 심판원은 “본인이 뛰었던 때보다 프로야구가 눈부시게 성장했다는 점을 늘 흐뭇해하셨다. 후배들이 수많은 팬의 사랑을 받으며 뛰는 모습을 보고 좋아했다”고 말했다. 그는 “형님은 한평생 야구만 했던 분이다. 꿈나무들을 가르치면서 지도하는 기쁨을 알았다. 새로운 구단이 생기면 꼭 감독이 되겠다는 말씀을 자주 했다.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떠났다”며 눈물지었다. 롯데 구단은 15일부터 사직구장 2층에 있는 자이언츠 박물관 내에 고 최동원 감독 추모소를 운영한다.
대구=김우철·서지영 기자
숫자로 본 최동원
1 구덕초등학교부터 경남고등학교까지 등번호 1번을 달았다.
4 84년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따냈다.
6 81년 실업야구 코리안시리즈에서 6경기에 등판해 2승 1세이브.
19 86년 19승에 머물며 3년 연속 20승 기록에 실패했다.
20 76년 청룡기고교대회 결승에서 군산상고를 맞아 잡아낸 삼진 수.
27 84년 최동원의 승수.
40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81년 시즌 뒤 최동원을 메이저리그 40인 로스터에 등록했다.
56 88년 9월 13일 한국프로야구선수협의회(선수회) 총회에서 최동원은 56표를 얻어 초대 회장에 선출됐다.
80 최동원은 프로야구 통산 124회 선발 등판에서 80번이나 완투 했다.
103 최동원의 프로야구 통산 승수.
155 81년 토론토 스카우트가 측정한 최동원의 직구 최고 구속.
209 선동열과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선발 맞대결인 87년 5월 16일 사직 경기에서 연장 15회 동안 최동원의 투구 수.
1019 최동원의 프로야구 통산 탈삼진
50만 74년 최동원은 부친 최윤식씨의 권유로 동해생명보험에 50만원짜리 어깨 보험을 들었다.
1억 83년 최동원이 롯데에 입단하며 받은 금액. 국내 첫‘1억 선수’였다.
대구구장에서 14일 열린 프로야구 삼성과 롯데의 경기에 앞서 양팀 선수들이 고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을 추모하는 묵념을 하고 있다. [대구=임현동 기자]
◆ 김인식(64) KBO 규칙위원장
“ 장난스러우면서도 예의 바른, 참 좋은 후배였는데…. 하늘에서도 웃고 있을 것 같다.”
◆ 강병철(65) 전 롯데 감독
“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6차전을 이기고 나니 7차전에도 무조건 나가겠다고 하더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최동원 말고는 없었다.”
◆ 이만수(53) SK 감독대행
“ 어제(13일)도 병원에 들렀는데 의식이 없다가 마지막으로 눈을 반짝 떠서 알아보고는 또 의식이 없어졌다. 제일 친한 친구가 젊은 나이에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니 마음이 너무 아프다.”
◆ 이광환(63) 전 LG 감독
“ 최동원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대투수다. 선수 시절 늘 자신보다 팀을 먼저 생각했다.”
◆ 김봉연(59) 극동대 교수
“ 최동원 감독은 연세대 시절 술·담배도 안 하고 성실했던 후배였다. 그가 남긴 한국시리즈 4승과 같은 위대한 기록은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 선동열(48) 전 삼성 감독
“ 어린 시절 동원이 형을 보며 투수의 꿈을 키웠다. 나의 롤 모델이었다. 주위에서는 라이벌이라고 했지만 나에게 동원이 형은 존경의 대상이었다.”
◆ 김택진(44) NC 구단주
“ 투수 최동원은 나의 우상이다. 마운드 위에서 강속구를 던지던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14일 전적
▶잠실 두산 7-12 LG ▶문학 넥센 7-8 SK
▶대구 롯데 5-8 삼성 ▶대전 KIA 7-18 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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