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wing a selfish portrait of history
Published: 10 Apr. 2014, 19:47
However, immediately following Germany’s surrender, France’s parliament voted 569 to 80 to place Petain as the head of state. The Vichy regime was the only legitimate government until France’s liberation. On Aug. 26, 1944, Charles de Gaulle arrived in Paris with the Allied forces, welcomed by millions of Parisians. But only four months before, on April 26, Petain came to Paris and was also welcomed by thousands of people.
The history of occupation was strictly kept secret for 20 years after World War II. Instead, de Gaulle’s heroic leadership and resistance activists' courageous fights against the Nazis were celebrated for having brought liberation.
However, no French soldier participated in the Invasion of Normandy, one of the turning points in the war, and de Gaulle was ignored and ostracized by the Allied command when they were discussing the landing operation. Yet the history of France highlights the heroic struggle of the people of the Grand Nation during World War II and reduces its defeat, collaboration with the Nazis and condoning of Jewish persecution. Instead, it justifies them as survival mechanisms.
History must teach facts. All countries package their histories by highlighting certain parts and equivocating some parts for pride and national morale. France and Japan may not be much different. But it is a completely different issue whether the history is told by the victim or the abuser. While the story of the victim remains an internal matter, whether it is about an individual or a country, fabrication by the abuser can lead to serious problems for others.
For example, let’s say a child picked a fight with a peer and beat him up. If the victim hides his wounds and claims that he fought back, it is his way of dealing with the situation. People will have sympathy for him, and it is strictly his own problem. But when the bully claims that he did not beat up the other child and has done nothing wrong, it turns into a more serious matter. Germany has fought many times and has promised never to do it again. But Japan continues to claim that it has done nothing wrong. When the abuser is not willing to keep the record straight, only more trouble awaits.
JoongAng Ilbo, April 10, Page 28
*The author is a professor at Duksung Women’s University.
BY RHIE WON-BOK
자신의 나라와 군대를 “위대한 조국”(La Grande Nation), "위대한 군대“(La Grande Armée)라 불렀던 나폴레옹의 ”위대한“ 역사를 지닌 프랑스에게 1940년 6월부터 1944년 8월까지의 나치지배 시절은 정말 참을 수 없고 기억하기 싫은 치욕일 것이다.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는 나치가 직접 통치하는 지역과 필립 페탱 원수를 수반으로 하는 나치 괴뢰 비시(Vichy)정부 지역으로 분할되었는데, 비시정부는 곧 허울만 남고 프랑스 전체가 나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항복 직후 프랑스의회는 찬성 569, 반대 80, 기권 17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패텡을 국가수반으로 인정했고 그의 비시 괴뢰정부는 프랑스가 해방될 때까지 유일한 합법정부였다. 1944년 8월 26일 드골이 연합군과 함께 백만 시민의 환영 속에 파리에 입성하였지만, 불과 4개월 전인 4월 26일 파리를 방문한 패텡은 수십만 인파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점령시대의 역사는 전후 20년간 철저하게 함구되었다. 대신 드골의 영웅적인 리더십과 레지스탕스들의 용감한 저항투쟁이 프랑스의 해방을 가능케 했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유럽해방의 첫 단추였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프랑스군은 단 한 명도 참전하지 못했고 드골은 상륙작전 회의장 근처에 얼씬도 못할 만큼 연합군의 무시와 왕따를 당했다. 이런데도 프랑스의 역사는 2차 대전 동안 위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영웅적인 투쟁을 기록할 뿐, 패배와 나치에의 부역, 유대인 박해의 방관 등은 축소하고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합리화한다. 역사는 팩트를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나라마다 국가의 자존심을 위해, 국가적 사기를 위해 어느 부분은 강조하고 어느 부분은 적당히 얼버무리는 등 역사포장을 하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는 프랑스나 일본이나 전혀 다를 바 없다. 문제는 그 역사포장이 피해자의 것이냐 가해자의 것이냐에 따라 성격은 크게 달라진다는 점이다. 피해자의 기술은 그것이 개인의 것이든 국가의 것이든 내부문제로 끝나지만, 가해자의 역사는 포장에 따라 당사자 여럿의 문제로 비화하기 때문이다. 가령 동네에서 한 아이가 싸움을 걸어 다른 아이가 많이 맞았다 치자. 맞은 아이가 상처를 감추고 “그래도 나는 용감히 싸웠다”고 말한다면 측은하긴 하지만 그건 그 아이 혼자의 문제로 끝난다. 하지만 때린 아이가 끝까지 때린 적도, 잘못한 것도 없다고 우기면 결국 동네싸움으로 번질 수밖에 없다. 싸움 경험이 많은 독일이 무릎 꿇고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는데 일본은 끝까지 잘못하지 않았다고 우긴다. 가해자의 역사기술 방식을 무시하니 이제 남은 건 동네싸움 뿐이다. 이원복 덕성여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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