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will decide the victims’ fate?
Published: 14 Nov. 2014, 07:32
The next day, I went to the square again, thinking that the protestors would demand an investigation into the causes of the deaths. But the square was quiet. Then I realized that Muslims were reluctant to get postmortem examinations and that it was customary to have a funeral within 24 hours of a person dying. As a result, the deaths of the protestors did not become a driving force of the struggle.
In September 1994, the MS Estonia sank in the Baltic Sea. It was one of the worst maritime disasters ever, where 852 of the 989 passengers and crew members died. Only 94 bodies were recovered. The Swedish government stopped the search after three months and announced that the ship would not be salvaged after the recommendation of the special ethics committee of philosophers, jurists and other specialists.
The prime reason for leaving the ship in the sea was the possibility of damage to the bodies. They thought it was better to leave the bodies in the sea rather than salvaging the ship and recovering the damaged bodies. The decision was also in consideration of the psychological shock the families and those involved in the search operation could suffer when they saw bodies that had been in the water for an extended period of time.
The MS Estonia is still underwater as a result. There was a rumor it was sealed with concrete. The Swedish government actually considered burying the whole ship but gave up on the project due to lack of technology and due to the predicted cost.
Controversies over burying the ship in the sea have risen over the past 20 years. Some families broke the special law banning a search of the wrecked ship and secretly hired divers to recover the bodies. Others sued the Swedish government at the 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 There have been various conspiracy theories. A notable theory was that Sweden was trying to bring in secret weapons developed by the former Soviet Union onboard the MS Estonia.
But the citizens supported the government’s decision for the most part.
The timeline is approaching to decide whether to salvage the Sewol ferry with nine people still missing. We don’t have a universal religious belief in Korea. There is hardly any senior figure that is widely respected by the majority of the citizens. Government officials are reluctant to speak up. There are so many obstacles.
*The author is a deputy editor of JoongAng Sunday. JoongAng Ilbo, Nov. 13, Page 35
By LEE SANG-EON
2011년 1월 28일 밤, 피 흘리며 등에 업혀 골목에서 나오는 청년들을 봤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변에서 였다. 시위 중에 다쳤으려니 생각했다. 그들이 경찰의 총에 맞았다는 것은 몇 시간 뒤에야 알았다. 시위대는 사망자가 100명이 넘는다고 주장했고, 이집트 정부는 발포 사실 자체를 전면 부인했다. 다음날 다시 광장으로 갔다. 사인을 포함한 진상의 규명을 요구하는 ‘장례 투쟁’이 들불처럼 번지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의외로 조용했다. 그 때 처음 알게 됐다. 이슬람권에서는 시신 부검을 극도로 꺼리며 통상 사후 24시간 이내에 장례를 마친다는 것을. 그 결과 죽음이 곧바로 투쟁의 동력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1994년 9월 발트해에서 여객선 MS 에스토니아호가 침몰했다. 989명의 승객ㆍ승무원 중 852명이 목숨을 잃은 대참사였다. 건져낸 시신은 94구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거의 다 배 안에 있을 것으로 추정됐다. 수습을 책임진 스웨덴 정부는 석 달 뒤 수색을 중단했다. 배 인양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철학자ㆍ법학자 등 각계의 원로급 전문가들로 만든 특별 윤리위원회의 권고에 따른 일이었다. 위원회의 첫째 반대 이유는 시신 훼손 가능성이었다. 온전히 수습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그대로 두는 게 옳다는 주장이었다. 그 다음으로 장기간 물 속에 있던 시신을 보게 될 가족과 다른 관련자들의 정신적 충격 등이 이유로 제시됐다. 에스토니아호는 지금 바다 속에 그대로 있다. 콘크리트로 봉인돼 있다고 잘 못 알려져 있기도 한데, 스웨덴 정부가 봉인을 시도하다가 기술과 비용의 문제 때문에 포기했다. 그 뒤 20년간 ‘수장’을 둘러싼 논란이 종종 일었다. 유족들이 선체 수색을 금지시킨 특별법을 어겨가며 잠수사를 고용해 개별적으로 시신을 찾으려다 적발된 일도 있었고, 몇몇 유족이 스웨덴 정부를 유럽인권재판소(ECHR)에 제소하기도 했다. 각종 음모론도 나왔다. 스웨덴이 에스토니아를 통해 옛 소련이 개발한 비밀 병기를 몰래 감춰 들여오려다 배에서 모종의 사고를 냈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렇긴 해도 국민들은 대체로 정부의 결정을 지지해왔다. 실종자 9명을 남겨놓은 채 세월호 인양 여부를 가려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에겐 공통의 종교적 믿음이 없다. 국민 대다수에게서 신망을 받는 원로급 인사도 극히 드물다. 공직자들은 눈치보며 우물쭈물하고 있다. 산 넘어 산이다. 이상언 중앙SUNDAY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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