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Dynasty horse armor requires a big lift: First-of-its-kind discovery will soon go on public display
Published: 13 Apr. 2020, 18:52
“The finding itself was a miracle because we can see before our eyes an example of a horse armor dating back to that age,” said Jeong Dae-hong, a researcher at 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Gnrich). “Whereas before, we could only imagine what they looked like via the wall paintings from the Goguryeo Kingdom [37 B.C. to A.D. 668].”
Ten years of research into the armor, including details about how the team was able to excavate the armor, was shared last week by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CHA) when it released a report on the finding.
“The report details how we were able to excavate the full set of horse armor and how we were able to preserve the artifact,” said Lee Jong-hoon, head of Gnrich, an affiliate of the CHA that spearheaded the excavation efforts.
From digging to preserving, the team shared what they were able to learn about the cavalry culture of the Three Kingdoms era of Korea.
Park Yoon-jung, an official of CHA, spearheaded the excavation of the horse chamfron and armor in Gyeongju.
“It was altogether some 740 pieces of armor buried in the earth for some 1,600 years,” Park said. “We had two options. One was to freeze everything as they are [by applying preservation materials] and to remove them from the ground, together with the earth.”
That would have ensured the pieces were preserved just as they were, but it would have meant that only one side of the armor pieces would have been visible to the public.
“The other option was to attempt to dig out the whole thing, artifacts and earth altogether, and face the risk of them all falling apart in the process of doing so,” Park said. “But if successful, it meant we could see the other sides of the armor pieces as well.”
They decided to take the risk.
The 740 pieces of the armor were found in a space about 292 centimeters (115 inches) wide and 90 centimeters long.
“The team decided to lift a 450 centimeter wide and 140 centimeter long chunk of earth out of the ground,” Park said. “Because there were stones lodged here and there in the earth, we had to be very careful.”
The team experimented on a chunk of earth with similar characteristics first. When it worked, they dug around the artifacts, applied preservation materials to hold everything together temporarily, placed a urethane-material fence around the area and on the bottom of the section and then lifted it.
Out came the chunk of earth, artifacts and all. In total, it was a 28-ton earth cake.
The team reduced its size to some 18 tons by working on it at the site and then moved it to a lab, where they continued to chip closer toward the pieces of armor.
Cavalry culture of Silla
The fact that the pieces were recovered in their entirety meant additional good news for anthropologists and historians.
“By studying the intact pieces, we could produce a model,” Jeong said.
The horse armor altogether would have weighed some 36 kilograms (79 pounds), according to the model that Gnrich put together.
Adding the weight of a man and his armor to this, a horse may have had to carry as much as 120 kilograms of weight at a time during battle, according to Gnrich.
But some experts think that the armor could have been made for display, not for actual use.
“We will have the model on display for public viewing as soon as the coronavirus situation improves,” Lee said. “I hope it will be a valuable addition to those studying the cavalry culture of Silla, the kingdom that emerged victorious among the Three Kingdoms of Korea.”
BY KANG HYE-RAN, ESTHER CHUNG [chung.juhee@joongang.co.kr]
1600년 전 신라갑옷의 부활···'28톤 흙케이크' 퍼올렸다
지난 2009년 신라 고분 최대 밀집지인 경북 경주시 황오동 일대 ‘쪽샘지구’에서 희귀한 유물이 발굴됐다. 일명 ‘C10호 묘’로 불린 고분에서 5세기께 장수가 착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찰갑(札甲·비늘형 갑옷)과 마갑(馬甲·말에 장착한 갑옷) 등 마구류 일체가 나온 것. 삼국시대 장수·말의 갑옷이 온전히 출토된 것은 당시 처음이었고 지금까지도 유일하다.
당시 기마문화의 실체를 일러줄 유물 출토에 국내 고고학계와 문화재 전문가들이 들떴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1600년 간 땅속에서 흐트러짐 없이 잠자고 있던 갑옷을 어떻게 원형 그대로 수습할 것인가? 그나마 마갑 위에 놓여 있던 장수 갑옷은 노출돼 있어 한점 한점 수습할 수 있었다(총 3800여 조각). 반면 규모(292.1×90.8cm)도 엄청난 마갑유구는 땅에 폭 박힌 채 마치 화석처럼 존재했다.
“이런 경우 흙과 유물을 통째로 굳힌 상태에서 떠내는 게 정석이었죠. 그러면 영원히 유물의 한쪽 면, 손으로 치면 ‘손등’만 보게 돼요. 온전한 마갑이 처음인데다 언제 다시 올 기회일지 몰라 꼭 ‘손바닥’까지 보고 싶었어요. 결국 유물이 묻힌 토양 전체를 통째로 들어내는 발굴에 착수합니다.”
당시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이종훈) 학예연구사로서 C10호 현장 수습을 이끌었던 박윤정 발굴제도과장의 회고다. 박 과장은 2007년부터 2012년까지 5년간 쪽샘지구 발굴 일선에서 뛰었고 이 가운데 18개월을 유물 수습에 매달렸다. 이 과정에서 국내 발굴 사상 전무후무한 ‘28t 규모의 흙더미 퍼올리기’가 시행됐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기회" 도박 걸었다
피 마르는 듯했던 발굴‧수습을 포함해 지난한 보존처리‧복원까지 쪽샘 마갑 연구 10년 여정을 돌아보는 보고서가 나왔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7일 『경주 쪽샘지구 신라고분유적Ⅹ-C10호 목곽묘 출토 마주·마갑 조사연구 보고서』를 발간하고 이를 연구소 홈페이지에도 공개했다.
딱딱한 학술용어로 채워진 보고서를 박윤정 과장의 도움말을 통해 복기하면, 당시 마갑 수습 과정은 이랬다.
일단 표면이 노출된 말 갑옷의 보호를 위해 임시 가건물을 설치했다. 냉난방 등 공조시설도 마련해 일정 온도‧습도가 유지되게 했다. 다음 유물이 묻혀 있는 토양을 연구했다. 흙으로만 돼있어도 퍼내기 쉽지 않은데, 흙더미 사이사이 냇돌(냇바닥에 오랜 시간 있으면서 물살에 다듬어진 돌)이 확인됐다.
“크기가 10~30cm로 사람 머리만했어요. 들어올리다가 이 돌들이 무너져 내리면 유물 전체가 훼손될 게 뻔하잖아요. 충격을 줄이려면 최대한 크고 넓게 파내야 했죠. 그뿐인가요. 실전에서 한치 실수라도 있으면 안되니까 먼저 테스트가 필요했어요.”(박 과장)
모의실험으로 유물 안전 여부 거듭 확인
결국 발굴팀은 인근 유사한 토양을 대상으로 모의발굴을 벌였다. 사람 키만한 깊이로 파고 들어가서 4.5m×1.4m 너비의 사방에 철판을 둘렀다. 이어서 이 흙더미를 단단히 엉겨붙게 할 강화제를 도포하고 한지를 부착한 뒤 석고붕대를 감싸고 발포우레탄을 약 20㎝ 두께로 충전했다. 이 상태에서 크레인으로 들어올렸다. 마치 거대한 케이크 조각을 땅에서 떠내듯이 한 셈이다.
“이 흙더미를 해체했을 때 유물이 온전할지 여부도 조사했죠. 그랬더니 좀 더 파내는 게 좋겠다는 결론이 났어요. 출토 상태가 좋지 않아 유물에 미세한 금들이 많았는데 약간의 충격도 위험했거든요.”
2010년 10월 17일. 철제 파이프와 H빔을 고정한 가운데 크레인으로 28t에 이르는 ‘흙케이크’가 떠올려졌다. 땅 위로 올라온 흙더미를 뒤집은 상태에서 1차 해체해 무게를 18t 가량으로 줄였다. 이렇게 줄인 유구를 연구소 보존처리실로 이동했다. 연구원들이 조심스레 흙을 파헤치며 바닥을 향해 갔다. 마침내 고대하던 ‘손바닥’이 드러났다. 한반도에서 발굴된 마갑의 뒷면이 처음으로 후세 연구자들에게 포착된 순간이다.
조랑말 크기에 120㎏ 짊어진 신라 군마
“마갑 뒷면 자체의 확보 뿐 아니라 마갑이 놓인 상태를 A부터 Z까지 알 수 있게 됐죠. 예컨대 마갑을 바로 놓았나, 그 밑에 갈대 같은 걸 깔았나 등. 남은 유기질을 통해 갑옷 표면에 붙은 견‧마 등 직물 종류를 파악한 덕에 당시 말 갖춤 일체의 재현이 가능해졌습니다.”
이번 보고서 전체 편집을 담당한 정대홍·심명보 학예연구사의 설명이다. 이에 따르면 당시 수습된 마갑 조각은 740매에 이르렀다. 10년 연구 끝에 최근 재현된 마갑 복제품 무게는 약 36kg에 이른다. 당시 말이 이런 갑옷을 두르고 역시 갑옷을 입은 장수를 태웠단 얘기다. 요즘 조랑말 크기로 추정되는 당시 군마가 총 120~130㎏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을까. 학계에서도 이런 마갑이 “의례용이었다” “실제 전투에 쓰였다” 등 의견이 갈린다. 후자를 지지하는 쪽은 고구려 쌍영총 벽화에 이와 똑같은 마갑을 착장한 말과 그에 올라탄 장수의 모습이 그려져있음을 증거로 제시한다.
이종훈 소장은 “말 갑옷 재현품을 일반 관객도 관람할 수 있게 코로나19 사태가 호전되는 대로 상반기 중 전시를 열 것”이라며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바탕이 됐을 신라 기마문화를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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