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power comes from the people
Published: 27 Dec. 2011, 19:31
We can’t predict the future, but we can look into the past. In 1775, 82-year-old King Yeongjo expressed a desire to have his grandson, who later became King Jeongjo, take care of state administration in his place. It was an alternative proposal, as his initial plan to hand over the throne to the heir was opposed by ministers. Inheriting the crown while the king is still alive is a very sensitive and complicated job. Two suns cannot be in the sky at the same time.
The ministers were nervous and confused as they had to see through to the true intention of the king. If the king really wanted to take a break, opposition would mean disloyalty. In contrast, if the king was just testing loyalty, supporting the abdication would mean treachery.
When Hong In-han, the deputy prime minister, opposed the transfer of the throne, he got it wrong. King Yeongjo dismissed Hong and he passed away less than three months later.
The Roman Empire was a society strictly based on merit. In Rome, the citizens elected the consuls based on their political competence. The emperor would hand over power only after his son gained experience and was recognized as competent to lead. If he felt the son was not up to the task, he would adopt a fitting candidate to assure legitimacy.
King Yeongjo was no different. He had Jeongjo adopted by his eldest son, Prince Hyojang, who died young. Kim Jong-il’s intention must have been similar to that of Yeongjo. He realized that he did not have much time left after having a stroke, so he hoped his son would quickly become a “dear leader.”
Nevertheless, he did not have the spirit of Rome in mind. He didn’t realize that the emperor’s power was approved by the Senate and the citizens. That’s how the Roman Empire earned respect from citizens. It is shame that Kim Jong-il did not have a chance to visit Rome in his life.
*The writer is a culture and sports news editor of the JoongAng Ilbo.
By Lee Hoon-beom
북한의 3세 세습 과정을 지켜보면서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김정은의 나이가 어린데다 후계 준비가 짧았기에 가능한 추론이다. 원래 대로라면 국방위 부위원장 장성택이 조카 김정은을 내치고 권좌에 올라야 하지만 단지 호사가들의 말 잔치일 뿐 북한 같은 폐쇄사회의 앞날을 어찌 예측할 수 있겠나. 근데 미래는 몰라도 과거를 살펴볼 순 있겠다. 1775년 여든 두 살의 영조는 세손(훗날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의향을 밝혔다. 양위(讓位) 의사를 슬쩍 내비쳤다가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자 짜낸 대안이다. 양위란 임금이 생전에 후계자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행위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듯, 권력도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이기에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고난도의 정치기술이다. 막상 신하들은 등줄기에는 식은 땀이 흐른다. 임금의 본심을 꿰뚫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임금이 정말 쉬고 싶어서 한 말인데도 양위에 반대하면 불충(不忠)이 되고, 반대로 임금이 단지 신하들의 충성심을 떠보기 위해 한 말인데 양위에 찬성하면 역적이 되니까 말이다. 드디어 좌의정 홍인한이 아뢴다.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도 알 필요 없으며, 조정 일은 더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 세손의 '대리청정'에 반대한다는 얘기였지만 그만 잘못 짚었다. 결국 영조는 홍인한을 파직하고, 세손의 대리청정을 공식 선포했으며, 석 달도 못돼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잘나갈 때 로마는 철저한 실력주의 사회였다. 공화정 시대에는 민회가 실력 있는 사람을 지도자로 선출했다. 이 정신은 제정 때까지 이어져 황제는 아들에게 경력을 쌓고 실력을 인정받게 한 뒤에야 후계자로 삼았다. 그런 자식이 없으면 능력자를 양자로 입양해 정통성을 확보했다. 영조의 뜻도 다르지 않았다. 세손이 대리청정을 통해 정사를 봄으로써 실력을 인정받게 하고 싶었다. 당쟁의 희생자였던 사도세자의 아들인 게 흠 잡힐까 싶어,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왕통을 잇게 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김정일 역시 뜻은 영조와 다르지 않았을 터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았겠지만, 아들이 당당하게 실력을 인정받길 바랐을 거다. 그래서 정조가 왕위에 오를 때보다 두 살이나 많은 아들이 ‘경애하는 수령님’이 될 수 있기를 바랐을 거다. 하지만 로마의 정신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황제 역시 원로원과 시민의 승인을 받아 통치권을 위임 받은 존재였다는 걸, 백성들의 경애가 거기서 나온다는 걸 말이다. 살아있다면 로마에 가보길 권할 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 아무데서나 ‘S.P.Q.R.’이라 쓰인 표지를 볼 수 있으니 하는 얘기다. ‘로마 원로원과 시민(Senatus Populus Que Romanus)’의 약자다. 이훈범 문화/스포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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