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데일리

Patriots come with varied philosophies

June 29,2004


One of the justifications for the coup that dethroned the Joseon Dynasty ruler Gwanghaegun in 1623 was the regime’s infidelity to the Ming Dynasty.

In the early 17th century, Gwanghaegun was reinforcing the military and pursuing “equidistant diplomacy” with the Ming Dynasty and its challenger, the Jurchens. The anti-Gwanghaegun group in Korea criticized that stance as a betrayal of the Ming Dynasty, which had saved Joseon from Japanese invaders.

Four years later, 30,000 Jurchen troops crossed the Yalu River and entered the Korean Peninsula. King Injo and his supporters, who had overthrown Gwanghaegun, were so focused on preventing another coup that they had neglected national defense.

King Injo came into power to save the relationship with the Ming, but the new court had no choice but to serve its new “older brother,” the Later Jin Dynasty.

When the Later Jin Dynasty changed its name to Qing in April 1636, the new dynasty demanded Joseon to redefine its brotherhood as a relationship of sovereign and subject. Although without a reliable defense plan, Joseon rejected the demand. The country was still infatuated with its obligation to the Ming. In December 1636, the Qing sent 120,000 troops. King Injo planned to fall back to Ganghwa island, but the Qing army intercepted the retreat. The court was divided into pragmatists led by Choi Myeong-gil and anti-Qing idealists led by Kim Sang-heon. Choi ultimately drafted and sent a surrender.

Later, Kim Sang-heon and the anti-Qing faction became the heroes of Joseon. But what would have happened if their opinion had ruled and Joseon had waged war against the Qing? The realistic decision to make peace saved the dynasty. Despite the different means, the two sides had the mutual goal of saving the country.

Recently, the government’s decision to send additional troops to Iraq has met with increasing skepticism and criticism. Even some members of the governing Uri Party are asking the administration to reconsider its decision.

The ruling party chairman, Shin Ki-nam, has said that what Seoul needs today is Choi Myeong-gil’s balanced sense of diplomacy. The situation is similar to the court of Injo over 370 years ago. History repeats itself.

The writer is an editorial writer of the JoongAng Ilbo.


by Lee Se-jung

최명길

1623년 광해군을 쿠데타로 몰아낸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었다. 광해군은 후금(청나라)의 급성장에 따른 동북아 정세의 급변에 대비해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국방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반정 세력은 이를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린 행위라고 비판한 것이다.

4년 뒤 후금 군사 3만명이 압록강을 넘어 침범했다. 정묘호란이다. 또 다른 쿠데타를 겁냈던 반정 세력은 국방력 강화에 소홀했다. 반정 세력은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을 내세워 집권했지만, 군사력 열세라는 현실 앞에서 후금을 형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후금은 1636년 4월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조선에 형제의 관계를 군신(君臣)의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했다. 조선은 이렇다할 방비책도 없이 청나라의 요구를 거부했다. 여전히 대명의리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해 12월 청군 12만명이 쳐들어 왔다.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강화도를 최후의 거점으로 잡고 싸워볼 계획이었지만 발빠른 청군이 길목을 차단하는 바람에 남한산성에 갇히고 말았다. 조정은 현실을 인정하자는 최명길 등 주화파와, 끝까지 싸우자는 김상헌 등 척화파로 나뉘었다. 최명길이 쓴 항복문서를 김상헌이 찢자 최명길은 이를 다시 기워 보냈다.

훗날 김상헌 등 척화파는 조선의 영웅이 되었다. 이들의 기개 덕분에 병자호란 이후에도 조선의 정신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이들의 주장대로 계속 전쟁을 했다면 한반도의 운명이 어찌 되었을까. 이런 점에서 현실주의자인 주화파 덕분에 조선왕조가 유지될 수 있었고, 척화파가 나중에 빛을 보게 된 것도 이들의 위기관리 능력 덕분이라는 분석도 있다. 주화파와 척화파 모두 방법이 달랐을 뿐 나라를 구하자는 데서 공통이었고, 결과적으로 상호보완을 하게 된 것이라는 평가다('위기관리의 리더십', 오인환 저).

최근 이라크 추가파병 결정을 철회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 내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의원이 적지 않다.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는 바로 최명길의 균형잡힌 외교감각"이라고 강조했다 한다. 370여년 전 인조 조정과 비슷한 모습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


이세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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