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데일리

Take stand on Korea’s Tokto islands

Mar 01,2005


On Sept. 29, 1904, Japanese deep-sea fisher Yozaburo Nakai petitioned to the Japanese interior, foreign and agricultural ministries to incorporate Liancourt Rocks into Japanese territory and lease the area for the purpose of sea lion hunting. Liancourt Rocks was the French name for the Tokto islands at the time. Because Japan could be accused of planning to annex Korea, the interior ministry opposed the idea. However, the foreign ministry snapped that such suspicions were groundless.

The petition was approved on Jan. 28, 1905. Furthermore, Japan built a naval watchtower on Tokto on Aug. 19, 1905. Sim Heung-taek, the governor of Ulleungdo island, learned of Japan’s occupation of Tokto on March 28, 1906, when an official of Shimane Prefecture slipped it. While the Royal Court of Korea was furious, the protest of the waning Great Han Empire was futile.

On April 30, 1882, an investigation team of 102 officers led by Inspector Lee Gyu-won arrived at Ulleungdo island. After a nine-day probe, seven days on foot and two days by boat, the mission recorded on the report, “78 Japanese loggers have infiltrated the island, and a wooden sign reading ‘Takeshima of the Great Japan’ has been put up at the harbor.”

In 1696, the 22nd year under King Sukjong’s reign, 16 fishermen, including An Yong-bok of Dongrae, went to Ulleungdo island. When Mr. An saw Japanese fishermen and fishing boats, he rebuked them as to why they were on Korean soil. The Japanese responded that they were residents of Takeshima and came to Ulleungdo island for fishing. They claimed that Tokto was a part of Japanese territory.

Japan had been tenaciously coveting the islands of Tokto, which had been a Korean territory since 512, the time of King Jijeung of Silla.

Today, the Japanese ambassador to Korea even held a news conference declaring Tokto was a part of Japan in the center of Seoul. However, the Korean government’s “Tokto diplomacy” is lukewarm at best.

It is only concerned with preventing tension from spreading, insisting that the case should not go to international court.

Such lukewarm attitudes might amplify doubts among the international community on the fact that the Tokto islands belong to Korea.

The writer is a deputy political news editor of the JoongAng Ilbo.


by Ahn Sung-kyoo

독도와 과거사

#과거1: 1904년 9월 29일, 일본 원양업자 나카이 요자브로(中井養三郞)는 일본 내무.외무.농상무성에 '강치잡이를 위해 리앙쿠르 섬을 일본 영토로 편입시켜 달라'고 청원했다. 리앙쿠르는 독도의 당시 프랑스어 표기. 내무성은 '일본이 한국합병 야욕을 갖고 있다는 의심을 받는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외무성은 "쓸데없는 의심"이라고 잘랐다. 청원은 이듬해 1월 28일 승인됐다. 여세를 몰아 일본은 1905년 8월 19일 해군용 독도 망루를 준공했다. 독도 강점 사실은 1906년 3월 28일 울(릉)도 군수 심흥택에게 통보됐다. 조정은 펄펄 뛰었지만 기우는 대한제국의 항변은 허망했다.

#과거2: 1882년 4월 30일, 검찰사 이규원을 대표로 하는 102명 규모의 조사단이 울릉도에 도착했다. 7일간 도보, 2일간 배로 조사한 보고서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일본인 78명이 벌목을 하러 침범해 있다. 항구에 '대일본국 송도(松島.독도)'란 커다란 나무 팻말까지 세워놨다."

#과거3: 숙종 22년인 1696년 동래 출신 안용복 등 16명의 어부가 울릉도로 갔다. 거기서 늘어선 일본 어선과 어부들을 보고 안용복은 "우리 땅에 감히 왜인이…"라며 꾸짖었다. 왜인들은 "우린 본래 송도(독도)에 사는데 고기 잡으러 왔다 이렇게 됐다"고 했다. 독도가 일본땅이란 것이다.

#과거4: 광해군 10년(1618년) 일본 도쿠가와 막부는 시마네현의 오다니와 무라가와 가문에 80년 동안 울릉도 도해 면허권을 내줬다. 당시 조선의 '섬 비우기(空島)정책'으로 울릉도는 텅 빈 상태였다. 그 틈을 타 섬에서 벌목하고 고기를 잡으라고 '도둑'허가를 내준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독도는 일본 배가 멋대로 들르는 '울릉도 착취의 전진기지'가 됐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도 임진왜란 이후 수탈당하는 기록이 나온다.

신라 지증왕 때인 512년 이후 줄곧 우리의 땅이었던 독도에 대한 일본의 탐내기는 이처럼 집요했다. 오늘날에는 주한 일본대사가 서울 한복판에서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기자회견까지 벌이는 판이다. 그런데도 정부의 '독도 외교'는 물렁해만 보인다. "국제사법재판소로 가면 안 된다"며 갈등 확산을 막는 데 급급해하는 모양새다. 그런 미온적 태도가 오히려 한국령 독도에 대한 국제적 의심을 키우는 게 아닐지 걱정이다.

안성규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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