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데일리

A block of steel that may yet melt

June 29,2005


Some writers are long remembered for their strange behavior. The poet Kim Jong-sam was one. He used to climb a mountain with a bottle of soju, take a drink, lie flat on his back and place a large rock on his chest. When asked about the rock, he said he felt he would fly off into the sky without it. A survivor of Japanese rule and the Korean War, Mr. Kim was preoccupied by death and by the tragedies his people suffered.

In those times, most writers agonized at the crossroads between life, death and their own confusion. Their eccentricities were breaths of freedom, liberations from reality. In his poem “Unwell Seoul,” Oh Jang-hwan cried, “Even broadcasts from the Japanese Emperor and delightful rumors were not convincing to my ears.” His fellow poet Lee Yong-ak wrote in “Barbarian Flower (Violet),” “Our distant ancestors, who survived long periods of battle with the Manchurian barbarians, have given you your name.”

Many writers of the time, including Mr. Oh and Mr. Lee, made the decision to go to North Korea. It was a time of confusion, when men who had tortured dissidents under colonial rule assumed high ranks in the police force, and former independence activists were labeled communists. Writers were told to produce works that contradicted their consciences. Both those who stayed in the South and those who left had much to say about the situation.

“In my view, Korea’s literary world today is full of laziness, vulgarity and the evasion of reality,” said Han Seol-ya, another writer who went North. With fellow novelist Lee Ki-young, he dreamed of visiting Seoul for a national literary conference on Dec. 12, 1945, but couldn’t make it happen. That was the end of inter-Korean literary exchange. Except for some individual visits, the writers have been apart for 60 years.

But perhaps the connection still exists. South Korea’s Association of Writers for National Literature and North Korea’s Korean Authors Union have agreed to hold a meeting at Mount Paektu next month. Poet Kim Soo-young wrote, “The 38th parallel is the highest iceberg in the world. How much deep, quiet love do we need to melt that steep block of steel?” He must be smiling at the news.

The writer is a deputy culture news editor at the JoongAng Ilbo.


by Chung Jae-suk

남북작가대회

세월이 가도 기이한 행동으로 남는 문인이 있다. 시인 김종삼이 그런 별종이다. 소주 한 병 차고 산으로 올라가길 즐기던 그는 한잔 걸친 뒤에는 가슴에 큰 돌을 얹어 놓고 대자로 드러눕곤 했다. "웬 돌이냐"는 물음에 시인은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고 난 그는 유난히 죽음을 물고 늘어졌다. 이승과 저승이 뒤섞여 돌아치던 민족의 비극을 시인은 죽음의 풍경에 빗댔다.

그 시절을 산 문인 대부분이 김 시인처럼 생사의 갈림길과 정신의 혼란으로 고민했다. 기행(奇行)은 문학하는 자에게 미칠 것 같은 절망의 현실을 뛰어넘는 해방 공간이자 자유의 숨쉬기였을 것이다. 빈털터리면서도 "오늘은 돈 없네, 동생" 한마디로 술집을 전세냈던 시인 오장환은 '병든 서울'에서 "일본 천황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내게는 곧이가 들리지 않았다"고 울었다. 공원 벤치가 집이었던 시인 이용악은 '오랑캐꽃'에서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 먼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라 읊었다.

그때, 오장환과 이용악을 비롯한 많은 문인이 북으로 갔다.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일본 제국주의 형사가 해방 조국의 경찰간부가 되고, 고문당하던 독립운동가는 그들에게 다시 빨갱이로 매도되는 혼돈의 시기였다. 글 쓰는 이로서의 양심이 기행 정도로 넘길 수 없는 행동을 문인에게 요구했다. 남은 사람도 할 말이, 간 사람도 해 줄 말이 넘치던 때였다.

"내가 보는 바로는 대체로 오늘의 조선 문단의 일반적 경향은 안이성과 비속성과 현실 도피성에의 타락이다. 이것을 전연 '때'의 죄로 버려야 옳은 것일까?"라 꾸짖은 소설가 한설야는 북으로 간 문인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소설가 이기영과 함께 1945년 12월 서울로 내려와 전국문학자대회 개최를 꿈꿨지만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기행으로 몸부림쳐도 지울 수 없었던 문학혼이 통했는가. 남의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북의 조선작가동맹이 다음달 평양과 백두산에서 남북작가대회를 연다. 60년 만이다. "우리의 38선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빙산의 하나이다. 이 가파른 철 덩어리를 녹이려면 얼마만한 깊은 사랑의 불의 조용한 침잠이 필요한가"라 했던 저승의 김수영 시인이 빙긋 웃겠다.

정재숙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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