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le dancer recalls life in a woman’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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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e dancer recalls life in a woman’s world


Lee Mae-bang, master of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Properties No. 27 “Seungmu” and No. 97 “Salpuri,” performs the Salpuri dance in a costume he made using his 110-year-old sewing machine. By Park Jong-keun

Lee Mae-bang has had an extraordinary career as a dancer. Born in 1926, Lee started dancing when he was 7, at a time when only women danced, and he studied with gisaeng, or female entertainers. When he was 19, he was conscripted into the Japanese navy, but ran away to Bigeum Island, South Jeolla, where he stayed until Korea was liberated from Japan. During the Korean War, the North Korean army descended onto Mokpo and Lee was suddenly made an executive member of North Korea’s dance alliance. After the North retreated, he performed for South Korean soldiers as a member of a special performing arts group.

But it hasn’t always been easy for Lee to be a man in what was once a woman’s world. He danced in roles traditionally performed by women and was considered beautiful, leading to questions about his sexuality. Lee, who has long been married, firmly denies suspicions that he is gay.

Now Lee is regarded as a master of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Properties No. 27 and No. 97, “Seungmu (Monk’s Dance)” and “Salpuri,” respectively.

These days, he performs at least once or twice a year. He last appeared on stage in a performance with his students at the National Gugak Center in Seoul in December.

The JoongAng Ilbo spoke with Lee on Feb. 14 at his home in Yangjae, southern Seoul.

Q. Have you ever been attracted to men?

A. Not at all. But there were a slew of jerks who tried to seduce me, thinking that I was gay.

Once, when I had a performance outside of Seoul, I had to share a room with another dancer. He was gay and tried to flirt with me so I kicked him in the nuts.

How did you start dancing?

My family told me that I began dancing in front of my mother’s mirror right after I started walking. My next-door neighbor was Ham Guk-hyang, the head of the local gisaeng house. One day, Ham suggested my mother register me with the (gisaeng) office and she agreed. My original name was Gyu-tae and Mae-bang is my stage name. I changed my legal name to Mae-bang about 13 years ago.

There weren’t many male dancers back then.

Learning to sing and dance was shameful, not only for men but also for families. You know Lee Nan-young (1916-1965), who sang “Tears of Mokpo”? She’s my second cousin. Her elder brother is Lee Bong-ryong (1914-1987) and he composed the song. She was kicked out of the house at 15. I was the only boy in (South Korea) who learned to dance at a gisaeng house and I did it without my father’s knowledge.

Who taught you to dance?

I studied with Lee Dae-jo for about 10 years from ages 7 to 17. Jin So-hong, who was famous for her beauty, taught me the Salpuri dance.

It is important to have a good teacher. Everything should be learned from a master. Otherwise, dance becomes ridiculous and vain. Every dance is different, even though the choreography is the same. The difference is the performer.

At times, I’ve found that some people who are designated as cultural assets are so inept that I swore at them. I’m not saying this to show off, but there is no one else who truly understands the sound, rhythm, music and dance like I do.

Dances like Seungmu and Salpuri are usually danced by women, aren’t they?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men and women in the fields of pansori (narrative singing), gayageum (zither) or dance. Indeed, both traits - yin and yang - should be incorporated in dancing.

Then why were they regarded as (dances) for women?

Because men didn’t dance back then. Korea was a conservative society, and people felt uncomfortable seeing a man dancing. But things are different now.

Tell me about what happened to you during the Korean War.

As soon as the war broke out, the North Korean army invaded Mokpo. They set up literary and dance alliances there. Suddenly, I was made vice president of the dance alliance. One day, Ahn Seung-hee, the daughter of a renowned North Korean dancer, came to Mokpo to perform. She had heard about me and asked me to go to North Korea. I just ran away from her.

Today, you have hundreds of students.

I have around 100 students. But there are only about 10 to 15 students among them who still work hard. Senior dancers get a certificate after a five-year course with me. But once they get the certificate, they become vain and don’t work hard.

The students dance in their own way or add other styles. After a while, they distort the essence of my dancing.

Will you have to choose a successor?

There are a number of candidates. To be honest, the only one who would not distort my dancing after I die is my wife.

How did you and your wife meet?

My wife studied dancing in middle school. She didn’t study with me, but with a senior dancer. My wife’s aunt knew a relative of mine, and they brought us together.

How does one become a great dancer?

Dance reflects the inner beauty of the self. In other words, your heart has to be in the right place to be a good dancer. You cannot depend on cheap tricks. In contrast, those who are not ready to dance laugh or look away while dancing. Artists are neither romantic nor optimistic. They just do their work without greed until the end.

By Sung Si-yoon []

Related Korean Article[중앙일보]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곱다”
“내 춤에 지들 춤을 섞어 … 그러니 내가 욕을 안 해?”

1926년에 태어났다. 일곱 살 때부터 기생들 사이에서 춤을 배웠다. 해군에 징집됐다 도망쳤다. 숨어 지내던 섬에서 해방을 맞았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목포까지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졸지에 ‘무용연맹’ 간부가 됐다. 이후에는 육군 군예대 소속으로 일선 장병 앞에서 춤을 췄다. 이어 현재까지 국내외의 크고 작은 무대에 섰다.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 그리고 97호 살풀이춤 예능보유자인 이매방(李梅芳·85) 선생이 걸어온 ‘외길’이다.

글=성시윤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지난해 12월에도 그는 제자들과 서울 국립국악원 무대에 섰다. 재작년에는 ‘이매방 춤 인생 75년 결산 공연’을 했다. 매년 한두 번씩 꼭 무대에 선다.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중에서도 두 가지(승무·살풀이춤)를 보유한 사람은 드물다. 14일 서울 양재동 이매방 선생의 자택을 찾아갔다.

●건강은 어떠신가요?

 “몸무게가 원래 60㎏이었는디 10여 년 전에 위암수술을 허고선 44㎏이여. 허리가 아파서 이제 무대 나갈래면 이틀 전부터 허리운동을 해야 해. 무대 출연을 할 때 이를 득득 갈고, 한 15분 출 것을 3분만 춰도, 얼굴만 내놓아도 좋다고 하니까 (무대에) 나갈 수밖에 없잖애.”

사진 촬영을 위해 승무①를 춘 이매방 선생은, 여장을 하고 추는 살풀이춤② 예능보유자이기도 하다. 걸죽한 입담으로 인터뷰에 응하는 동안은 영락없는 할아버지였지만 ③하루도 빠지지 않고 바느질을 한다며 이날도 재봉틀 앞에 앉았다④.
●춤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으셨나요?

 “우리 아버지가 쉰셋에, 어머니가 마흔여섯에 나를 낳았는디 내가 10남매 중 10번이야. 원래는 1926년생인데 호적에는 27년에 올렸어. 그때는 애기들이 많이 죽었잖애. 내가 걸음마를 할 때부터 어머니 경대(거울) 앞에서 혼자 춤추고 그랬대. 그때 우리 옆집에 목포권번 수(首)기생인 함국향(咸菊香)이 살았거든. 우리 ‘엄니’더러 ‘성님’ 하면서 지냈는데, ‘성님! 규태가 춤을 좋아하니 권번에 입문시킵시다’ 했지. 그래서 울 ‘엄니’가 ‘그래주면 고맙제’ 했고.”


 “원래 내 이름이 규태(圭泰)여. ‘매방’은 내 예명이고. 13년 전인가, 재판을 해서 이름(본명)을 이매방으로 고쳤어.”

●춤 배우는 남자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죠.

 “어디 남자뿐인가? 그땐 노래랑 춤 배운다 하면 가문에 없는 망신이라고 경장히(굉장히) 난리였제. ‘목포의 눈물’ 부른 이난영(1916∼65년) 있지? 난영이 누님이 나랑 6촌 간이야. 그 위의 오빠가 ‘목포는 항구다’(1942년)를 작곡한 이봉룡(1914∼87년)이고. 난영이 누님은 열다섯에 집에서 쫓겨났지 않애. 남자로 권번에서 춤 배우는 사람은 조선땅에 나 하나였다니께.”

●부친께서 많이 반대하셨겠네요.

 “아버지 몰래 했지. 아버지가 목포에서 광주까지 작대기(지팡이) 짚고 무대 위에 와서 춤추는 날 후려패고, 내가 도망가고 그랬어.”

●권번에선 어떤 분께 춤을 배우셨나요?

 “이대조 선생이신데, 일곱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근 10년을 배웠어. 살풀이춤은, 미인으로 유명했던 진소홍 선생께 배웠지. 선생을 잘 만나야 하거든. 모든 것은 실력 있는 사람한테 배워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춤이 우습게 돼버리고, 헛것이야. 춤은 다 똑같애도 보면 틀려. 그런데 국민은 모르잖애. 그래서 내가 오매 저런 것이 (무슨) 문화재…. 에라, 엿먹어라. 그래서 내 별명이 욕 대장, 따발총. 내 자랑이 아니라 지금 무용 하는 애들이 육자배기를 알아, 흥타령을 할 줄 알아. 나만큼 소리를 알고, 장단을 알고, 음악을 타고, 듣고 감상하고 춤추는 사람은 나배끼 없어.”

●정식 데뷔는 ‘대타’로 하게 되셨다면서요?

 “유명한 임방울(1904∼1961년) 대명창 있잖애. 임방울씨가 목포역에서 명인·명창 대회를 여는데 내가 거기서 첫 무대에 섰어. 목포역 공터에 드럼통 한 40개 깔아놓고, 그 위에 판자를 놓으면 무대가 될 거 아냐. 그러니께 노천극장, 야외무대란 말이시. 거기서 승무를 했지. 원래 하기로 돼 있던 분이 못 오게 돼서….”

●반응은 어땠나요? 많이 떨리셨겠어요.

 “열여섯에 뭘 알겠어. 선생님한테 배운 그대로 춤을 췄지. 끝나고 나오니까 노인네들이 ‘오매! 나는 기집앤 줄 알았더니 사내자식이네, 오매. 이쁘고 춤 잘 춘다’ 이랬지.”

●혹시 ‘내가 여성성을 타고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은 안 드셨어요?

 “나는 그런 것 없었어. 춤만 좋아했지.”

●승무나 살풀이춤이 원래는 여자들이 추는 춤이죠?

 “소리나 가야금이나, 피리나 춤이나 여자·남자 구별이 없어. 춤은 여자 춤, 남자 춤 구별이 없어. 남자가 있어야 여자가 있고, 밤이 있어야 낮이 있고. 모든 것이 음양의 이치여. 춤에는 음양이 다 들어 있어야 돼.”

●그런데 왜 여자 춤으로 여기게 된 거죠?

 “춤추는 남자가 없었으니께. 옛날 우리나라가 보수적이라 남자가 춤춘다 하면 ‘징그럽고 재수 없다’고 그랬지 않애? ‘사내새끼가 무슨 춤을…’ 했으니까. 요새는 그만큼 개화가 된 것이제.”

●‘탈영’하신 경험이 있다면서요.

 “열아홉에 해군에 징집됐어. 경남 진해에 갔는데 어휴, 훈련이 어찌나 힘든지…. 산에 철조망을 두르고 전기를 흐르게 해놓았는데, 철조망 아래 땅을 파가지고 밤에 도망을 갔어. 목포에서 배 타고 비금도까지 도망갔다가 해방 나고 나왔지. 해방 안 되고 잽혔으면 징역이지, 아이고 하여튼 그땐 고생도 많이 했어.”

●6·25 사변 때 얘기도 해주시죠.

 “6·25 나자마자 인민군이 목포까지 들어왔잖애. 그래서 목포에 문학연맹, 무용연맹 이런 게 생겼어. 나중에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했던 차범석(1924∼2006년·희곡작가) 형님이 위원장을 하고, 내가 부위원장을 했지. 그때 북한 무용가 최승희(1911~67년)의 딸 안성희가 목포 와서 공연도 했어. 내가 구경을 갔는데, 안성희가 누구한테 내 말을 들었는지 ‘당신이 규태씨요?’ 해. 예명 쓰기 전이었거든. 그래서 ‘네, 맞습니다’ 했더니 ‘같이 이북 갑시다’ 하더라고. 까딱하면 나 끌고 이북 가겠다 싶어 삼심육계 도망을 갔다니까.”

●그 경력 때문에 고생은 안 하셨나요.

 “나중에 아군이 들어오고 인민군이 이북으로 도로 갔지 않애. 아군한테 끌려가서 ‘어찌 해서 인민군하고 손 잡고 무용연맹 했냐” 해서 ‘내가 안 죽으려고 하니까 그랬지 어째서 했겠냐’ 했지. 그랬더니 아군도 이해하지. 나는 양쪽에 왔다갔다 활동을 했어. 육군 군예대(軍藝隊)를 했거든. 전쟁 때 가수·영화배우들이 다 군예대를 했지 않애. 나 있을 때 우리 1소대장이 영화배우 황해(1921~2005년), 3소대장이 허장강(1924~75년)이었어.”

 그는 군예대에서 나와 50년대 중반 이후 군산·부산·광주 등지에서 무용연구소를 차렸다. 87년에 승무, 90년에 살풀이춤 예능보유자 지정을 받았다.

●배우·가수들이랑 외국 공연도 많이 다니셨죠.

 “60년대에는 ‘황성옛터’를 부른 고복수(1911~72년) 형님, 거기 부인이면서 역시 가수 했던 황금심(1922~2001년)씨, 김정구(1916~98년)씨, 그리고 이미자(70),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이서 일본 순회공연을 몇 달씩 다니고 그랬제. 이미자는 쬐깐할 때 요릿집에 꽃 팔러 다니고 그랬어. 그걸 내가 많이 봤지. 그러니까 과거를 묻지 말란 말이야. 누구나 과거를 따지면 유치하고 그렇지만 누구나 과거가 있을 것 아니야.”

●국악인 중에서 누구와 친하셨어요?

 “박동진(1916~2003년) 형님이랑 외국 공연을 같이 많이 다녔거든. 정부에서 보내주니까. 별 델 다 갔어. 가면 형님이랑 나하고 둘이 한 방에서 자. 그럼 그 형님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방 쩌기서 “에~ 하나님 무엇이 어쩌고…, 에~ 예수그리스도가 어쩌고’ 이런 식으로 소리를 해. 그래서 내가 “형님 안 주무시고, 무슨 예수그리스도를 찾고 그라요” 하면 그 형님이 ‘XX놈, 귀도 밝다. 잠이나 자라. XX놈아’ 그랬지.”

●제자도 아주 많으시죠.

 “지금은 한 100명쯤. 개중에 지금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열댓 명 되나. 어느 지방이 됐든 대학교 무용과에서 한국무용 교수 하는 사람은 거의 다 내 문하를 거친 사람 아녀?”

●열심히 안하는 제자들은 왜 그렇죠.

 “내 문하에서 5년 동안 전수 과정을 거치면 원로 무용가들이 심사를 해서 이수증을 줘. 이수증 받으면 그때부터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자만심·만족감을 느껴서 정신머리가 틀어져 갖고 지가 최고봉인 줄 알아. 그래서 몇 년 후로 보면 내 춤을 변질시켜버려. 그럼 내가 볼 때 저런 쥑일 연놈이 있나, 저럴 수 있을까 하지.”

●그후론 찾아오지도 않나요?

 “통 안 오다가 지가 개인 발표 한다 하면 프로그램에 내 사진 내려고 사과나 빵 같은 것을 사 갖고 와서 ‘선생님’ 하고 애교를 떨지. 그럼 내가 욕을 안 할 수 있어?”

●사진을 안 주시나요.

 “왔으니까 주긴 하지. 공연을 한다 허니께. 그런데 ‘요년도 똑같겠지’ 하면 역시 똑같아. 내 춤 원본에다가 지들 춤을 섞어. 여그가 인간 도떼기시장이여. 이러니 내가 욕을 안 해?”


 “이매방한테 배웠다 하는 것을 알려서 자기 격을 올리려고 하는 허영이고 잡질이지. 이수증 받을 때까진 열심히 내 춤을 추거든. 그런데 내 춤이 어렵거든. 추기가 고약스럽고. 그러니까 지도 모르게 자기 춤이 나와. 그놈이 또 딴 춤을 끼워넣고. 내 춤도 아니고, 요샛말로 짬뽕, 비빔밥이야.”

 이 선생은 제자들 얘기를 할 때 얼굴이 붉어졌다. 알고 보니 사연이 있었다. 이 선생에 따르면 그에게서 춤을 열몇 시간 배운 여자 하나가 30년을 배웠다고 서류를 꾸며 정부로부터 ‘쯩’ 하나를 받았다. 이선생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기절초풍해 피를 두 컵이나 쏟았다”고 했다.

 “옛날에 각혈 환자는 전염된다고들 했잖애. 그래서 소문이 나면 연구소 문 닫을까 싶어 제자들 몰래 내가 피를 다 치웠어. 그리고 아침에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진찰하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고 묻기에 ‘분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랬더니 ‘피 토하고 죽는다는 게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오’ 하더라고.”

 이 선생은 “문화재청(당시는 문화재 관리국) 담당자에게 사실을 알렸지만, 넉 달 만에 담당자가 바뀌고 시간이 흘러 여태껏 그 서류가 취소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생전에 후계자를 정하셔야 하는 것이죠?

 “후계자 후보가 많애. 그래도 내가 죽고도 내 춤을 변질 안 시킬 사람은 노골적으로 말해 내 처밖에 없어. 딴 것들은 내 앞에 올 때는 ‘선생님’ 해쌌고 돌아서서 몇 년 동안 나한테 공부하러 안 와.”

 이 선생은 1970년에 무용가 김명자(68)씨와 결혼했다. 그의 나이 마흔넷, 아내는 스물일곱일 때였다.

●결혼 전에도 여자가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내가 술 좋아하고 담배도 하루 두 갑 반 피웠는데, 여자는 안 좋아했어. 내가 생각해도 술은 좋아하는 편이었어. 술고래라고 그랬다니까. 암수술 하고 술·담배 싹 다 끊었지.”

●혹시 남자를 좋아하셨나요?

 “난 그런 거 못 느꼈어. 나를 ‘호모’로 착각해 가지고 유혹하려고 한 놈은 많이 있었지. 지방공연 갔을 때 영화배우 남자 주인공 하던 놈 하나랑 방을 같이 썼거든. 그런데 요샛말로 호모야. 나를 유혹하려 하기에 냅다 거기를 때려버렸지. 과거를 말하자면 우습고 재밌고 그래.”

이매방 선생 가족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우리 처는 여중 때부터 무용을 했어. 나한테서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선배 되는 무용가, 국악인한테 했지. 그런데 자기 고모가 우리 외가 쪽 누님하고 서로 언니·동생을 했어. 두 분이 사돈을 맺자 해서 우리를 소개해 준 것이지.”

●사모님은 결혼 이후에 선생님께 춤을 배웠군요.

 “결혼한 지 40년 됐으니까…. 내 춤 그대로 추고. 내 딸도 나한테 배웠고.”

●부부 간에도 가르치고 배우는 게 가능한가요?

 “모르면 나한테 배워야지. 배울 땐 다른 제자들이랑 섞어서 배웠지. 우리 처가 춤을 그런대로 잘 춰.”

●어떻게 해야 춤을 잘 추는 것인가요.

 “정직해야 춤이 고와.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곱단 말이지. 머리 굴려서 춤추면 되냐. 안 되지.”

●춤출 때 머리 굴리는 게 보이세요?

 “보면 알지. 마음이 고운 사람은 열심히 춰. 그런데 마음이 불량하고 머리 굴리는 애는 춤추다 옆을 보고, 웃지 않아야 할 장면에 막 웃고 그래. 그게 점수 많이 따려고 머리 굴리는 거 아냐? 내가 평생 무용을 하면서 80까지 늙었는데 그걸 모르겠어. 예술 하는 사람은 성격이 낭만적·낙천적 아니야. 욕심을 버리고 해야 돼. 한도 끝도 없는 게 예술이지.”

●스승의 말씀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곱다 ’ 하셨어. 선생님 살아계신다면 내가 허리 아프더라도 천리·만리 찾아가서 인사하고 공부하고 싶지. 선생님도 떠나시고 형님들도 이제 다 떠나고 없어. 나밖에는…,”

110년 된 재봉틀 … 무대 의상은 손수

이매방(85) 선생 댁 거실에는 매우 오래돼 보이는 독일제 재봉틀이 하나 놓여 있다.“세상에 자기 의상 만드는 무용가는 나밖에 없잖애. 저 재봉틀도 우리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갖고 온 겨, 110년 된 거야.”

 그의 매부가 양복점을 했다. 소학교(현재의 초등학교)·중학교를 오가는 길에 수시로 들러 재봉을 배웠다.

14일 인터뷰 때 입고 있던 저고리·버선이며, 사진촬영 때 꺼내 입은 고깔·장삼·홍띠 모두 그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어디 내 옷뿐이야? 제자들 공연하면 무대 의상도 내가 다 해주지. 내가 삯은 받지. 안 받고 하면 내가 미쳤다고 혀? 안 받으려고 해도 제자들이 애원을 혀. 그래서 내가 ‘알았다, 이년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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