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데일리

Japan retains pride over imperial past

Mar 15,2005


Second lieutenant Hiroo Onoda of the Imperial Army of Japan was sent to Lubang island of the Philippines in December 1944. His mission was to destroy the U.S. military airstrip and lead guerrilla battles. When the Japanese army unit on Lubang island was defeated by U.S. troops in March 1945, 22-year-old Onoda went into the jungle with Corporal Shoichi Shimada and Private Kinshichi Kozuka. In 1954, Mr. Shimada died, and then in 1965, Mr. Kozuka followed. However, Mr. Onoda’s battle continued. Over three decades, the Japanese government sent a mission to search the jungle, and even his brothers came to the island to look for him. He even saw a flier announcing Japan’s defeat. However, he did not believe any of them. On Feb. 23, 1974, he finally came out of the jungle after receiving an order to surrender from Yoshimi Taniguchi, his direct boss during the war. The Japanese public was fascinated by his military spirit. At the surrender ceremony, Mr. Onoda stood at attention, and his rustless bayonet ignited reminiscences of imperialism among Japanese.

Ryuzo Sejima was sent to Manchuria in July 1945 as a staff officer in the Kwantung Army. After the end of the World War II, he had been detained in Siberia by the Soviet Union for 11 years until he returned to Japan in August 1956. He joined the Itohchu Corporation in 1958. He proved himself at the company immediately and became chairman in 1978. The Japanese novel “Wasteland” is based on his dramatic life. In his memoir, he repented saying, “The obsession with expanding the territory and influence was the decisive cause of the defeat.” Which of the two soldiers reflects actual Japanese sentiment better? On Dec. 7, 1988, a member of the Nagasaki Municipal Council asked Mayor Hinoshi Motojima about his opinion on the emperor’s accountability for the war. The mayor resolutely said that the emperor was accountable. Mr. Motojima dealt with severe criticism after the comment. The Liberal Democratic Party members of the council demanded he withdraw his comment. In January 1990, he was shot by a right-wing group leader. The incident shows how hard and dangerous it is to be “conscientious” in Japan. Seventeen years have passed, but the extreme rightists such as the “Japanese Society for History Textbook Reform” are actively propagating their beliefs, and a local government claims that Tokto is Japanese territory.

It makes me heavy at heart that we cannot expect much from Japan, where the imperialistic sprit and Mr. Onoda’s followers still prevail after 60 years.

The writer is a deputy political news editor of the JoongAng Ilbo.


by Ahn Sung-kyoo

두 일본군

오노다 히로(小野田寬郞) 일본 육군 소위는 1944년 12월 필리핀 루방섬에 파견된다. 임무는 미군 비행장 활주로 파괴와 유격전. 45년 3월 루방섬의 일본군이 미군에게 패하자 22세의 오노다는 시마다 쇼이치(島田壓一)하사, 고즈카 가나시치(小塚金七)일병과 산으로 들어갔다. 54년엔 시마다가, 65년엔 고즈카가 사망했다. 오노다의 '나홀로 전투'는 그래도 계속됐다. 강산이 세 번 변하는 사이 일본 정부가 수색대를 보내고, 오노다의 형제가 몇 번씩 와서 그를 찾았고 스스로 패전을 알리는 전단도 봤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안 믿었다. 74년 2월 23일 직속상관이었던 다니구치 요시미(谷口義美)에게서 투항명령서를 받고나서야 정글을 나왔다. 52세 때였다.

일본 국민과 매스컴은 오노다의 군인정신에 열광했다. 투항명령서 전달식, 마르코스 당시 필리핀 대통령에 대한 항복 신고, 부동의 자세, 녹슬지 않은 총검…. 눌려있던 일본인의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가 오노다를 통해 분출됐다.

세지마 류조(瀨島龍三)대좌는 45년 7월 만주 관동군 참모로 발령받았다. 종전 뒤 11년간 소련에 억류됐다 56년 8월 돌아왔다. 그는 58년 이토추상사에 입사해 고속 승진을 거듭, 78년 회장이 됐다. 파란만장한 경력 때문에 일본의 소설 '불모지대'의 주인공이 될 정도였다. 그는 회상록에서 "영역과 세력권 확대에 집착한 게 패망의 길로 들어선 결정적 원인"이라고 전쟁을 반성했다. 그는 전쟁을 반성하는 양심적 군인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둘 중 누가 오늘 일본의 진짜 정서를 반영할까.

시사점이 있다. 88년 12월 7일 나카사키 시의회의 한 의원이 모토지마 히토시 시장에게 천황의 전쟁책임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시장은 단호히 "책임있다"고 했다. 후폭풍이 닥쳤다. 자민당 시의원들이 발언철회를 요구했고 당은 그를 고문직에서 내쫓았다. 협박편지도 쇄도했다. 90년 1월 그는 우익단체 간부의 총에 맞았지만 살아났다. 일본에서 '양심적'이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보여주는 대표적 실례로 꼽힌다.

그로부터 17년. '새 역사를 생각하는 모임' 같은 극우파들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지방정부는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우긴다. 60년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오노다 아류'의 정신이 판치는 일본에 무슨 기대를 할 수 있을지 암담할 뿐이다.

안성규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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